올 2월 초 규모 7.8의 강력한 지진이 할퀴고 간 튀르키예(구 터키). 날씨는 영하로 떨어지는데 정부가 약속한 구호물품과 필수장비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자 할머니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재난지역 인근에 사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구조대를 조직하여 당장 급한 구호물품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왜소한 당신들 등에 몸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자루를 매고 있다. 그 안에는 겨울옷, 담요에서 전기히터, 매트리스와 이유식에 이르기까지 급하디 급한 구호품들이 가득하다.
할머니들은 구호센터에 구호품을 내려놓고는 다시 빈 자루를 매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고령(7~80대로 추정)의 할머니들의 활약상은 지진의 주요 피해 지역인 튀르키예 남동부에 안 미치는 데가 없을 정도다.
할머니들 눈에 이재민들은 바로 당신의 아들, 딸 그리고 손주로 보였을 것이다. 한평생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참고 버텨온 그들이지만 자식들이 힘들어하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었을 테다.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원래 용감이란 단어와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 “엄마, 나 힘들어!”, “할머니, 나 배고파” 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진 말이다. 고통과 좌절이 생길 때 어김없이 주름살 패인 그들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할머니이니까, 엄마이니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며칠 동안 집을 비우게 된 정봉이 엄마(라미란 분)는 무뚝뚝한 형제에게 집 잘 보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하루도 안 되어 싱크대엔 설거지하지 않은 라면 냄비가 쌓이고, 연탄불은 꺼졌고, 빈 짜장면 그릇은 쌓여간다. 며칠 후,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는 엄마 전화에 삼 형제(정봉이 아빠 포함)는 비상이 걸린다. 집에 도착한 정봉이 엄마는 자신이 없었는데도 잘 돌아간다(?)는 걸 확인하고는 오히려 짜증을 낸다. 왜냐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에 대한 증명이랄까,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싱크대에는 설거지 그릇이 쌓여있어야 했다. “나 없으면 이 집구석은 돌아가질 않아!” 이 소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상황이라면 아주 큰일 날 소리지만 말이다. 30년 전에는 당연했던 전개다.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없는 건 할머니의 내리사랑이다. 당신의 삶을 즐겨야 할 실버 세대가 다시 육아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요즘이다. 맞벌이 부부나 한부모 가정의 증가, 저출산으로 인한 한 자녀 세대 고령 인구 증가 등의 이유로 할머니들은 쉬지 못한다. 미국 사정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기관에 따르면 맞벌이 부모의 42%가 손자를 할머니에게 의지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미국 경제의 숨은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지만, 할머니들의 사랑과 희생 아니면 그들은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 손주에게 할머니를 뺏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엄마를 대신한 할머니의 육아 동참은 코로나 시대에 더욱 두드러졌다. 코로나 시국에 손주를 돌본 이들도 조부모이고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옆에 서 있는 보호자도 이들이다. 사회 여건상 육아 휴직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젊은 직장인이 많은 현실이다. 무엇보다 조부모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게 훨씬 안전한 것도 사실이다.
자의든 타이든 손주들을 양육하다 보면 자식 키울 때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을 맛보곤 한다. 그 덕일까, 손주 돌봄 시장도 덩달아 확대된다. 전쟁을 경험했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앞 세대와 달리 지금 할배·할매들은 손주들을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미국 조부모들도 장난감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핵심 구매층이라고 한다. 우리도 전자상거래 업체의 유아·아동 장난감 구매의 36%가 50대 이상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 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로 ‘양육’, ‘지혜’(미국), ‘따뜻함’, ‘옛날이야기’(영국)와 ‘따뜻함’, ’‘보살핌’(멕시코) 등을 꼽는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는 기독교 문화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 중 하나다. 어머니의 양육과 보호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천 개의 손과 눈으로 알려진 관세음보살 역시 자비와 연민의 어머니 모습이다. 큰 보따리를 맨 튀르키예 할머니이고 손주에게 무한한 사랑을 전하는 우리네 할머니가 바로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