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의 위치가 잘못 고증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한 사람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계의 원로 황수영 박사였다. 특히 그는 1960년대 이후 석굴암의 수리 공사를 주도했고 문무대왕 해중릉의 성격 규명이라든가 이견대의 위치 확인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가 2002년 4월 불교신문에 연재한 ‘불적일화(佛跡逸話)’라는 회고담을 통해 털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67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1300-1600여㎡(약 400-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瓦片)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현재의 이견대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하지만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러한 견해가 공개적으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이견대의 위치를 재고증해 보려는 아무런 공식적인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소관부처인 문화재청 역시 “구체적인 학술적 연구 성과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행 이견대의 위치 변경 지정이나 사적지 해제 등은 결정되기 어려우며, 다만 해당 관리단체인 경주시에 통보하여 이에 대한 검토를 요청할 것”이라는 정도의 반응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누구든지 스스로의 오류를 흔쾌히 털어놓고 바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평생을 이 분야에 종사해온 노학자의 어려운 고백을 애써 흘려듣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이견대의 원래 위치는 과연 어디가 맞는가? 발굴 결과 이견대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학자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면 현재의 이견대의 위치는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이견대를 찾아보자
제주도 올레길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둘레길 열풍이 불고 있다. 현재 개발된 둘레길 가운데 가장 길고 풍광이 멋진 길로 소문난 것이 해파랑길이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가진 둘레길이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에 이르는 총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770Km에 이르는 길이다. 이 중에서 경주에 해당하는 구간은 10-11코스인데 감은사와 이견대를 포함한 길이 11코스이다. 감포와 울산을 잇는 31번 국도와 929번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견대 쪽으로 50여 m를 가다가 산 쪽을 보면 길은 보이지 않고 우거진 잡초 속에 ‘듬북재’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얼마 전까지 ‘듬북재’라는 팻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길이 해파랑길의 일부인 감포깍지길 7구간이다. 이 길은 ‘소리에 끌려 걷는 길이’라는 별칭이 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물새들의 노래 소리에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7-8분 정도 오르면 제법 너른 대지가 나타난다. 한가운데 황수영 박사가 보았다던 우뚝 선 비석을 중심으로 제법 너른 평지에 두 기의 묘가 있다.*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순우, 매일신문 2005.5.4**1905년 경주 태생으로 1923년 보성고보를 수료한 후 1926년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민간문화재보호 연구단체의 효시인 경주고적보존회의 촉탁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창설에 기여하고, 남산 불교 유적 학술조사, 남산 신성비, 흥덕왕릉 비편 발견, 원원사지 석탑 복원 등 신라 문화재 발굴과 보존에 크게 공헌하였다.***대본초등학교는 폐교가 되고 그 자리에 문무대왕유조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