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외동읍 제내마을 토성소류지 옆에는 1619년(광해군11)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1570~1647)이 지은 별장 육의당과 석호정사(石湖精舍)가 자리한다.
경주최씨 최계종은 의병장이라는 칭호와 함께 최진립 장군과 자주 언급되며, 경주 임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부친 최신보(崔臣輔,1531~1577), 모친 평해황씨는 최진흥, 최진망, 최진립, 최계종을 두었고, 최계종은 승훈랑 최동로(崔東老), 구례현감 최동언(崔東彦), 종사랑 최동신(崔東愼) 세 아들을 두었다.
임란이 발발하자 숙부 최봉천(崔奉天), 형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곽재우 등과 회맹하였다. 「문천회맹록」에 그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정온(鄭蘊,1569~1641)의 『동계실기』에 “최계종 등이 정병 300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고, 6월 7일에 박의장이 합세하니 4200여명에 이른다” 기록한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해 서생포(西生浦)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남포(藍浦)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의 정인홍ㆍ이이첨 등이 득세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 즉 수모론(讎母論)이 대두되고, 인목대비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까지 발생한다. 폐모론을 반대하는 남인의 입장으로 최계종 역시 벼슬에 나아가길 완고히 거부하다가 함경도로 유배를 당한다.
다행히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도움으로 풀려나 고향 경주로 돌아와 석호에 자리를 잡고 여생을 즐겼는데, 당시 유배 가면서도 죽을 자리를 얻었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갔다고 전하니 그의 기백이 정말 대단하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에게 묘표를 부탁한 최석우(崔錫祐) 역시 1906년 영천을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서 금전과 엽수 등을 지원한 의사(義士)였다. 지금도 석호정사 상의사(尙義祠)에서 음력 3월에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니 경주의 의병역사 공부를 위해 사계절 아침저녁으로 빼어난 풍광을 품은 육의당 탐방을 추천하는 바이다.
육의당 최 공 묘표 - 면암 최익현
육의당 최계종의 자는 경승(慶承), 그 선조는 경주인 신라 시랑(侍郞)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이다. … 병자호란에 잠와 최진립 선생은 충절과 절개로 추앙받아 백성들이 노래하였으니 최계종은 그의 동생이다.
공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킨 공이 있는데,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첨정을 거쳐 서생포 첨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렀으나 남포(藍浦)현감에 제수되어 임지에 이르렀으나 이때는 광해군의 수모론(讎母論)으로 간사한 무리가 권병(權柄)을 농락하고 천리(天理)와 인륜이 거의 종식되었었다.
공은 사자(使者)에게 “군인이 멀리 떠남에 비록 할 말이 없겠지만 오늘에야 벗어남이 옳을 것이다”라 말하였으니 말과 어조가 짐짓 힘찼다. 이때 무리들이 그 말을 듣고는 크게 성내었고, 사형은 면하여 함경북도의 육군에 충원되어 유배가는데 사자를 재촉해 길을 떠났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의 도움으로 사면되었고, 이에 석호(石湖) 곁에 집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경서를 읽고 예의를 돈독히 행하였으며, ‘육의(六宜)’라 편액한 것은 아침과 저녁 그리고 사계절의 경치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사서(沙西) 전식(全湜,1563~1642),정문익(鄭文翼,1571~1639),몽암(蒙菴) 이채(李埰,1616~1684),졸재(拙齋) 이의잠(李宜潛,1576~1635) 등과 평소에 막역한 사이였다. … 아! 지키려는 것은 자기의 뜻을 뿐이요, 관직과 명예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기풍을 세우는 만세의 가르침인 까닭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후손인 최석우(崔錫祐)가 나[최익현]에게도 한 집안 같은 정의가 있기에 묘소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