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통해 ‘오페라’라는 음악장르가 탄생한 이래 이탈리아는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오페라의 종주국임을 자처해왔다. 당시엔 오페라라고 하면 당연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의미했다. 이탈리아는 근대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몬테베르디를 시작으로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 베르디와 같은 오페라 명장을 간단없이 배출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독일에서 ‘오페라 이탈리아’의 아성에 도전하는 이가 나타난다. 바로 바그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음악극(musicdrama)이라 불린다. 음악극은 음악(music)에 극(drama)이 들어있는 다분히 낭만주의적 용어이다. 하지만 베르디만 해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차용하여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오페라(예를 들면, 멕베스나 오텔로)를 만들었기에 이것만으로 음악극의 특징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그너 음악극은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이 존재한다. 이는 언어의 차이에 크게 기인한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별이 명확하다. 사건을 전개시키는 역할의 레치타티보 사이에 주인공의 격정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아리아가 배치되어 있다. 이를 번호(number) 오페라라고 하는데, 오늘날 뮤지컬에도 ‘넘버’라는 모습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남녀 주인공들이 멋들어지게 아리아를 부르고 나면 관객들의 박수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덕분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잠시 끊어진다.
바그너의 음악극을 처음 감상해본 사람은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른다. 가수들이 레치타티보 풍으로 주구장창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관객들이 박수를 칠 틈이 없다. 바그너의 음악극에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오케스트라는 중단 없이 계속 연주를 한다. 이것을 무한선율(unendiche Melodie)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는 대체로 반주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공연 분위기는 노래 잘 하는 성악가가 무대 위에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벨칸토 시대의 오페라는 초절기교를 부리는 소프라노의 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바그너 음악극에서는 성악과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대등하다. 단순 반주에 그쳤던 오케스트라가 바그너 음악극에서는 극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유도동기(Leitmotiv)가 나온다.
유도동기는 음악극에서 특징적인 주제선율로써 극의 전개를 암시한다. 관객들은 오케스트라의 음악만 들어도 주인공이 어떤 상태인지,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 수 있다. 유도동기는 20세기 영화음악이나 드라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화 ‘죠스’(1978)의 주제음악이 들리면 관객들은 공포에 떨게 되고,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슈베르트의 마왕이 들리면 늘 김주영(김서형 분)이 나타난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자음이 많아 상대적으로 투박한 독일어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어로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바그너는 이런 독일어의 약점을 감추면서 신화에 근거한 스펙타클한 스토리와 적극적인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오페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