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 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시인이며 영문학자인 김종길님이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그리는 시이다.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도 어언 30년이 가까워 온다. 참 어려운 세월을 사셨던 분이다. 세 살 무렵 조부모님을 여의시자 증조모께서 거두어 주셨다. 어머님을 만나 결혼을 하시고 딸이 세상에 태어나자 곧 징용으로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가시게 되었다. 모진 고생 중에 해방이 되자 빈손으로 귀국하셨다. 이어 한국전쟁이 터지고 이후 고난의 세월을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시었다. 자식들로부터 변변한 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하시고 그만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시었다. 오늘따라 그런 내 아버님을 몹시 뵙고 싶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문왕의 아버지는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기까지 ‘숨차시게, 숨차시게’ 달려온 문무대왕이었다. 죽은 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국가를 보위하겠노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 줌의 재가 되어 이곳 동해에 뿌려진 문무대왕. 삼한일통의 위업을 완수하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아들 신문왕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도 아버지인 문무대왕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이견대는 주역(周易) 가운데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바다에 나타난 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늘을 나르는 용은 선왕인 문무대왕, 크게 얻은 이익이란 만파식적을 이르는 것이리라.『삼국유사』 「기이」편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감은사를 완공한 이듬해인 임오(壬午)에 신문왕이 해관(海官) 박숙청(朴夙淸)의 말을 듣고 이곳 이견대에 행차하여 거북의 머리와 같은 형상의 바위에서 대나무를 얻어 와서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이견대(利見臺)’라는 가요가 있는데,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한 곳으로 이를 노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 노래가 ‘이견대가(利見臺歌)’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왕의 부자는 헤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상봉하게 되자 대(臺)를 쌓아서 부자 상봉의 기쁨을 다하고 「이견대」를 지어 불렀다”고 하였다. 왕의 부자가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 이웃 나라에 나가서 회동(會同)하였는 지도 모르겠고, 혹 인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평을 더하고 있다.그러나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는 의하면 “후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의 이름이 이견대”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그 기념으로 682년에 이견대를 지었다는 해석도 있다.현재의 이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를 확인하고, 신라시대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이견정(利見亭)을 세웠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마루에 오르면 곧바로 대왕암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