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슬픔, 타자를 위한 마음자리 우리는 흔히 슬픔은 병적인 증상이니 빨리 털어내라고 말하지만 큰 상실의 경험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되어 가슴 안쪽에 쌓이기 마련이다.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사건 같은 상실이 그렇다. 어찌 그런 사건뿐이랴. 자잘한 일들이 우리를 슬픔으로 가두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며 새삼 타자를 위한 자리를 생각하는 것은 왜일까? ‘한 사람’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 이 시는 두 번째 ‘한 사람’까지가 화자가 먼저 무기력한 슬픔에 빠지는 과정이고, 세 번째 ‘한 사람’에 이르러 그 슬픔에 동질감을 느끼고, 마지막에 닫힌 문 속에 유폐된 ‘슬픔’에게 쾅쾅 문을 두드려 일깨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발단과 전개, 절정, 결말이 역동적이고도 신선하다. 먼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나에 대한 어떤 헤아림도 없이 그저 “내 너머의 빛”(이성)을 향해 돌진을 하니, 내 깊은 곳에 도달할 리가 없다.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말 뿐이다. 또 ‘한 사람’은 내 쪽으로 논리의 비질을 하며 다가온다. 나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 갈 것" 같아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비틀댄다. 어느새 골목엔 ‘비질로 인해’ 굳고,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돌진한 흔적으로 인한 “짙은 어스럼이 내려앉”는다. 그것은 외적인 어둠과 내면의 어둠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그때 화자는 “가파른 계단에 앉아” 어둠 속의 ‘한 사람’이 부는 리코더 소리, 그 “뜻없는 선율”이 자신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키고 자신의 슬픔(감상)을 일깨우는 걸 본다. 리코더 소리를 분, 그 ‘한 사람’은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내 곁을 파고든다. 슬픔은 와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일체화된 슬픔의 든든한 힘이여! 이 때 슬픔은 타자를 위한 마음의 밑자리가 된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레코더를 부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말 못할 깊은 슬픔에 빠진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린다. 슬픔은 무기력한 자아를 일으키고 타자와 함께 하는 가능성으로 역전된다. 그렇다. 때로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하며(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만한 거름”은 없는 법 (허수경, 「탈상」)이다. “죽어가는 꽃 곁에”( 「벽제화원」) 산다는 시인의, 우울과 애도의 ‘정동’을 넘어서는 강력한 시 한 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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