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려(蒼廬) 이정기(李鼎基,1759~1836)는 회재의 후손으로 어려서 경주 선비 몽암(蒙巖) 정희(鄭熺,1723~1793)에게 수학하였고, 179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과거를 멀리하고 학문연구에 매진한 인물이다. 정희는 활산 남용만, 노우 정충필 등의 만사(輓詞)를 짓는 등 지역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옥산서원이 자리하였다.
이정기의 문학성 연구 가운데 그가 남긴 옥산구곡시는 선대의 위업을 잇고 옥산구곡 공간설정에 기여한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 회재 사후에 퇴계의 후손 이구서(李龜書)의 아들인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은 옥산서원을 찾아 퇴계의 스승인 회재선생을 참배하고, 계정 주위를 유람한 후 그 아름다움에 탄복해 「옥산구곡」시를 지었고, 이구휴(李龜烋)의 아들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1755~1831) 역시 「옥산구곡 용무이도가운 병서(用武夷櫂歌韻 幷序)」를 지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한 옥산구곡시는 180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데 앞서 이정기는 1823년 4월에 이야순, 이가순 및 남려(南廬) 이정엄(李鼎儼,1755~1831), 치암(恥庵) 이악상(李岳祥,1763~1829), 남봉양(南鳳陽), 손순지(孫淳之), 김경진(金經進) 등과 옥산을 답사하며 구곡을 설정하였는데, 이때 광뢰 이야순의 조언과 역할이 매우 컸었다.이정기의 옥산구곡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미년(1823) 초여름에 수석(漱石) 이야순(李野淳(字 健之)이 호정(浩亭)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여러 곳을 들렀다. 그리고는 남봉양(南鳳陽(字 鳴應)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호(琴湖)를 지났다. 비를 맞으며 평려(平廬)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문소(聞韶) 김시유(金時有)가 마침 향오(香塢)에 머물다가 와서 함께 담소를 나눴는데, 이웃에 사는 벗 손순지(孫淳之) 또한 모였다. 이야순이 무이구곡을 언급하며 “도산(陶山)에는 구곡이 있는데 옥산(玉山)에만 구곡이 없어서야 안되거늘 어찌하여 구곡을 품정(品定)하지 않는가?”하니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李鼎基 󰡔蒼廬集󰡕 卷1, 「玉山九曲 敬次武夷九曲十首 幷識」)”라 하였다. 앞서 칠곡, 팔공산, 영천 등에서 활동한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1660~1720)의 「暮春遊玉山九曲」등은 공간설정의 구곡이 아니라 풍광이 아름다운 굽이치는 옥산을 얘기하였고, 이후 이정엄의 옥산구곡가, 금파 이정병의 옥산구곡 그리고 모암(慕庵) 권도(權燾,1761~1837), 소우재(疎迂齋) 이관영(李觀永,1780~1835), 창헌 조우각, 해은 강필효, 죽오 하범운, 모정 이시수, 하암 이종휴 등은 공간설정이 포함된 옥산구곡시 등을 남겼다.
이정기는 옥산구곡과 관련해 주자의 무이구곡가 서문을 포함한 10수를 바탕으로 물길을 오르면서 1곡 송단, 용추, 세심대, 공간, 관어대, 폭포암, 징심대, 탁영대, 9곡 사자암 순으로 읊조렸는데, 옥산구곡의 장소 비정은 이미 광뢰 이야순에 의해 정리가 되었고, 이후 많은 문인들에 의해 재인용되어 회자되고 있다.
주자는 복건성의 무이산을 배경으로 산은 높고 구름이 깊어 늘상 숲은 어둑어둑하고, 이에 나그네도 알 길 없는 인적 드문 곳에 그저 뱃사공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표현하였다. 이정기는 5곡 관어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산회오곡일홍심(山回五曲一泓深) 산을 휘감아 도는 한 깊은 웅덩이의 5곡대상유정부죽림(臺上遺亭俯竹林) 대 위에 남겨진 정자는 대숲에 숨었다네연약호유수취미(淵躍濠游殊趣味) 물고기가 물에서 뛰는 흥취는 참으로 좋고관어수식저반심(觀魚須識這般心) 물고기 바라보니 진정 이들의 마음 알겠네 회재의 자취가 서린 독락당과 계정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관어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보인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로도 불리었기에 무이정사와 일맥하는 의미가 있고, 구곡의 주인공이 거처하는 중심 공간이 되기도 한다.창려 이정기, 금파 이정병 등 경주 양동의 문인들 역시 안동의 퇴계 이황의 자취가 서린 도산구곡을 많이 읊조렸는데, 이는 고제(高弟), 혼반(婚班), 교우(交友) 등 다양한 교류관계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경주의 옥산서원 그리고 옥산을 주자의 무이구곡과 연관지어 등장한 옥산구곡이 실체화되는 순간이 바로 광뢰 이야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계 이가순 역시 옥산구곡을 남겼고, 수많은 문인들이 옥산을 찾아 주변의 풍광을 읊조리고, 나아가 옥산구곡의 장소 비정과 구곡시의 정형화를 이끌었다. 이렇듯 옥산구곡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룰 연구논문과 학술대회가 이어지질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