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초등학교 6학년 14세 학생이라면 지금 59세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고 해도 54세다. 지금의 50대 중·후반의 연령대가 만화영화 ‘똘이장군’에 열광하던 세대라는 말이다.
‘똘이장군’은 우리나라 만화영화의 고전 중의 고전인 ‘로보트 태권브이’ 시리즈를 제작한 김청기 감독의 작품이다. ‘로보트 태권V’의 인기에 힘입은 김청기 사단이 어린이용 반공영화 ‘똘이장군’을 제작했는데 그 역시 공전의 인기를 기록했다.
당시의 영화를 보면 전형적인 대북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978년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일컬어 북한괴뢰도당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던 때다. 당시 초등학교는 북괴의 침략에 맞선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학교마다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고 반공 포스트 그리기 대회, 반공 표어 짓기 선발대회가 열렸다. 북괴에 대한 적개심은 어린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심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 어른들 중 6.25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친척이나 가족들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거리에는 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들이 도처에서 활보하고 있었고 학교에는 상이군인의 자녀들인 원호대상 친구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학교마다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이승복 어린이는 1968년 발생한 울진삼척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된 9살 비극의 어린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로 반공의 화신이 된 이승복 어린이 동상은 전국 초등학교 어느 곳이건 일사불란하게 세워져 반공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화는 뒤에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가 다분히 조작되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법정공방까지 가는 끝에 유야무야되었으며 그 후 이승복 어린이에 대한 추모사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학교 복도와 학교 교사의 벽, 오르내리는 계단 빈 공간에는 반드시 거대한 벽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북한의 도발을 묘사한 그림들이 기록화처럼 그려져 있었고 북괴의 만행들이 잔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특히 북괴는 언제나 무서운 돼지나 늑대로 묘사되어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의 적개심의 대상으로, 한편으로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똘이장군은 바로 이런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반영해 만들어진 만화영화였다. 김일성은 붉은 돼지로 그를 추종하는 북괴 도당들은 전부 늑대로 묘사되었다. 그 붉은 돼지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며 자신의 욕심만을 채웠고 늑대 무리는 돼지에게 갖은 아부를 다 하며 더 간악하게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런 늑대와 돼지를 우리의 영웅 똘이장군이 커다란 주먹으로 혼내주는 장면은 어린이들에게 통쾌함과 감동을 선사했다. 똘이장군이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며 마침내 돼지 수괴를 쓰러뜨리는 순간 영화관은 열광에 찬 함성의 도가니로 변했다.
똘이장군의 제작시기는 마침 그 두 해 전인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북괴의 도끼만행사건과 겹쳐 있다. 똘이장군은 북한의 이런 침략적 만행에 대한 반탄력으로 제작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만화영화의 영향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똘이장군이 제작될 시기의 남북한 대치상황을 보면 십분 이해가 가면서도 북한에 대한 무턱댄 적개심이 45년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된 원인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50대 중반 이후 국민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알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북한을 대하고 있는데 그 밑바탕에는 전쟁의 참화와 함께 당시의 지나친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이 자리잡고 있다.
돌이켜 보면 똘이장군이 상영되던 1978년 당시는 우리가 북한에 비해 확실한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다. 이후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980년대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2010년대 이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에 비해 북한은 아직도 일인세습독재체제에 세계최빈국을 헤매고 있다. 완벽한 우위를 점한 우리가 바야흐로 북한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현명한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갈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50대 중반 이상 국민들의 가슴에는 아직도 북한은 막연한 증오와 은근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런 저변에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수정되거나 보강되지 않았던 처연한 반공이데올로기 교육과 그 대명사로서의 똘이장군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똘이장군 이상으로 북한을 억눌렀지만 아직도 그 붉은 돼지와 늑대들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히 돌아볼 때다. 확실한 우세로 현명한 대북관계를 이끌기보다 그 긴 어둠의 그림자를 이용해 아직도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정치인들이 판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