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자전거
박화남
허공에도 길을 내어 달리고 싶은 걸까
보름달 이마 위에 지문 몰래 찍어 두고
아버지
바퀴를 굴린다
세상이 다 둥글도록
태풍이 길 막아도 멈춘 적 없었다는
사십 년 연애 같은 우체부 가방 놓자
어깨가
가벼워진다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해도 달도 돌리시는 아버지의 사랑
일찍이 러시아 혁명기 우크라이나의 유대민족 수난을 다룬 숄렘 알레이헴의 원작 『테비에와 딸들』을 두 라노비치가 뮤지컬로 각색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뮤지컬이 있었다. 주어진 삶에 긍지를 갖고 가난하지만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직한 우유가공업자 테비에 일가의 삶을 다룬 이 작품에서, 지붕 위처럼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추락하지 않고 자신의 연주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비밀은 바로 ‘전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작품에서 제목을 발상했을 법한 이 시조는 현실과 상상의 자재로운 변주가 놀랍도록 신선하다. 지붕위로 올라간 아버지의 자전거는 당연히 죽은 아버지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시인은 실제로 “어깨가/가벼워진다며/지붕 위로 올라갔다”라는 말로 죽은 아버지의 그곳으로의 이동을 감동적으로 묘파한다. 그러나 놀라운 건 그때부터 아버지의 삶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약간 다르지만 우체부의 삶이란 길이 길을 부르는, 길 끝에 또 길이 더해지는, 인정人情과 세사世事가 놓인 길의 내력을 자전거 바퀴에 감아 돌리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그 바퀴는 우체부인 아버지가 “사십 년 연애 같은 우체부 가방”에서 무수한 이름들을 호명해낼 때마다, 그 행복과 슬픔, 삶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다져넣으며 때로는 햇살을 때로는 빗방울을 감으며 돌아갔으리라.
그러나 이제 자전거가, 아니 아버지가 지붕에 올라감으로써 우리는 우체부인 아버지가 홀가분하게 “세상이 다 둥글도록” 굴리는 그 리듬에 맞춰, 마침내 천체(달)를 돌리는 영원의 존재가 되는 경이를 체험한다. 시인의 환상과 무의식이 빚어내는 아버지의 노동행위는 당연히 현실의 곤고와는 다른 편에 놓인 “어깨가 가벼워진” 유쾌한 노동이다.
일생을 우직하게 길 위를 달리며 자신의 생을 겸허히 감당한 아버지 생애에 대한 감사와 빛나는 후생에 대한 헌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시조는 특히 첫째 수와 둘째 수의 시간을 역순행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시적 완성도와 깊이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문체와 리듬도 특히 유연성이 굽이친다. 삶의 핍진한 구체성과 사유를 밀고 가는 능력, 이미지가 가진 눈부심을 등한히 하지 않음으로써 예측하기 어려운 심미성에 도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젊은 시조 시인 박화남은 언어를 ‘엮고’ ‘풀고’ ‘다스리는’ 솜씨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깊이가 돋보이는 작가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와 오랜 숙성을 거친 후에 빚어내는 심미감 넘치는 선명한 형상화는 언어에 대한 예각으로 작품 읽는 맛을 싱그럽게 출렁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