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의 수졸당(守拙堂) 고택 맞은편 언덕에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 1576~1635)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호정(東湖亭) 정자가 있다. 높은 곳에 세워진 정자는 비교적 관광객 발걸음이 적어서 조용히 앉아 사색하기에 좋고 마을을 조망하기에 수월하며, 정면으로 수목이 길을 내어주면 경주방향으로 산천이 시야에 들어온다. 앞면 4칸의 팔작지붕과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 2칸, 양쪽 1칸씩 온돌방이 배치되었고, 지금도 후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이의잠은 모친 옥산장씨와 수암공(守庵公) 이응인(李應仁, 1535~1593) 사이에서 4남의 막내로 경주 양동마을에서 출생하였다. 풍채가 좋았고 성품은 공손하였으며 4세에 모친이 죽자 부친은 아들이 가여웠지만 가르치기를 늦추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설천정(雪川亭) 이의활(李宜活, 1573~1627),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1564~1597)과 옥산서원에서 독서하였다. 1592년 왜란이 발발하자 부친과 함께 토벌에 참여하였고, 얼마 후 부친상을 마치고는 1595년에 참봉 손엽(孫曄,1544~1600), 남포현감 최계종(崔繼宗,1570~1647), 참봉 권응행(權應生,1571~1647) 등 여러 사람과 창의해서 왜적을 물리쳤으며, 팔공산회맹에도 참여하였다.
청도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6)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612년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찰방․의금부도사․하양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학을 계승하며 1627년에 옥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1617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부산 동래로 온천욕을 다녀올 적에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등과 함께 경주부로 맞이해 유람을 다니며 경전을 묻고 익혔는데,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을 보면 당시에 경주부윤 윤이영(尹貽永)이 노곡천(奴谷川)에서 이의잠,손우남(孫宇男),정사상(鄭四象),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등과 함께 한강 일행을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훗날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가 묘지명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이 묘갈명 등을 지어 그의 행적을 전하였다. 동호정 정문을 지나면 대청마루 안에 걸린 동호정 현판이 눈에 들어오고 9대손 곡포(谷圃) 이능윤(李能允,1850~1930)과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1841~1924) 등이 지은 동호정기(東湖亭記) 현판 등이 걸려있다. 1900년대 초반에 기문이 지어진 것을 미뤄보면 아마도 정자 역시 비슷한 시기에 편액이 걸린 듯하다.
류필영의 「동호정기」를 보면, “정자는 수졸공 이의잠 선생께서 거처하는 곳에서 동쪽 산에 있고 동호(東湖)라 편액하였으니, 이곳은 선생께서 일찍이 형강(兄江) 가의 동호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었다. 동호에는 윤암(綸巖) 즉 백씨(伯氏) 무첨당 이의윤 선생이 머물던** 곳이 있었고, 공이 그 뜻을 이어서 이곳 동호에 의거해 집 짓는 일을 도모하였다. 이미 이름을 명하였으나 집은 아직 300년 동안 이루지 못하였고, 동호가 뒤집히고 윤암이 돌아가시어 그 땅에 정자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이곳에 집을 짓고 옛 편액을 걸은 것은 당시의 남기신 뜻을 쫓은 이유에서이다”라며, 무첨당과 연관된 동호의 내력을 언급하였다.
회재 선생의 손자인 무첨당 이의윤․양졸당 이의징․설천정 이의활․수졸당 이의잠․오의정 이의온 등이 각각 가학을 계승하며 터전을 닦았으며, 전주류씨 류필영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1777~1861)의 문인으로 역학(易學)과 시경(詩經)에 조예가 깊었고,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영남 유림의 주축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 독립청원운동에 서명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의잠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시대적 행보에 대한 조사는 미비한 상태이며, 집안사람과 지역사의 연관관계를 통해 그의 업적이 조명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