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1849년 드레스덴 혁명 이후 스위스 취리히로 도피했다. 비록 도망자의 신분이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와 입담으로 취리히 현지에서 인맥을 넓혀갔다. 특히 1852년 거상 오토 베젠동크(Otto Wesendonck/1815-1896)와의 만남은 바그너 인생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그너가 오토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마틸데(Mathilde Wesendonck/1828-1902)를 연모했기 때문이다.
오토는 1857년 취리히 근교에 지은 대저택의 별관에 바그너 부부를 불러 살게 했다. 바그너는 연모하던 마틸데를 매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근 10년 동안 집필 중이던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를 (지크프리트의 2막 부분에서) 접고,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과 마틸데의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자신은 트리스탄, 마틸데는 이졸데다. 이들은 현실에서도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갔다. 명백한 불륜이었다.
바그너는 불과 2개월 후 대본을 완성한 후 낭독회를 열었는데, 이날 바그너의 여인들이 모두 모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현재의 아내 민나, 현재 사랑에 빠진 마틸데, 훗날 아내가 되는 코지마가 모두 참석한다. 낭독회를 마친 후 마틸데는 크게 감동하여 시를 쓴다. 바그너는 마틸데의 시로 가곡을 만들어 헌정하는데, 바로 베젠동크 가곡이다. 5편으로 구성된 베젠동크 가곡의 일부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인용된다.
두 사람의 불륜은 이듬해(1858년) 발각된다. 민나가 둘 사이에 오간 연애편지를 보게 되었고, 그녀는 오토에게 고자질을 한다. 아무리 바그너가 철면피라지만 더 이상 베젠동크 부부의 집에서 머물 순 없었다. 그는 취리히를 떠나 베네치아에 한동안 머물다가 루체른에 돌아오는 동안 작곡을 완료했다(1859년). 이젠 무대에 올릴 일만 남았다. 바그너는 개작한 탄호이저를 파리 무대에 먼저 올리고(1861년), 이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하려고 했다.
하나같이 모두 어렵고 길기까지 한 바그너의 작품들을 선뜻 무대에 올려주는 극장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낙담하고 있던 바그너에게 희소식이 날아든다. 로엔그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바이에른의 젊은 왕 루트비히2세(Ludwig II/1845-1886)가 왕위에 오르자(1864년)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빙한 것이다. 4시간짜리 대작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루트비히2세의 후원으로 드디어 뮌헨극장에서 초연(1865년)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켈트족의 전설이다. 오페라 배경이 아일랜드에서 콘월로 가는 배(1막), 콘월(2막), 브르타뉴(3막)인데, 모두 켈트 족의 언어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는 콘월의 마르케왕과 결혼하기 위해 콘월로 가는 중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마르케왕의 조카이자 용맹한 기사인 트리스탄과 사랑에 빠진다. 둘의 사랑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결국 트리스탄이 먼저 죽고, 이졸데가 따라 죽음으로써 오페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바그너다운 최초의 음악극 작품이면서 최초의 현대음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대놓고 불협화음인 트리스탄코드(Tristanchord)는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바그너 작품 중에서 가장 통속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마틸데 부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작품에 노골적으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죽자며 노래하는 사랑의 이중창(2막)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3막) 아리아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