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펼쳐봤다. 경주의 여섯 부족이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곳, 서라벌은 신성한 산, 전설을 품은 숲과 강, 그리고 넓은 평지로 이뤄져 있다. 방리제(坊里制)로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구획된 도시구조에 목탑과 기와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월성 주변의 대형 전각들이 들어선 유구와 인근의 김유신 장군의 집터인 재매정지 등을 통해 판단해보면 과거 서라벌의 중심부는 지금 경주의 중심지와 다른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찬란하던 서라벌의 영광도 왕조가 바뀌자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새로운 고려왕조는 월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도시체계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신라의 중심부를 비켜서 월성 북서쪽에 새로운 읍성을 세웠다. 이제 새로운 중심지를 내세워 기존의 지배 체계가 달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경주의 행정, 문화, 정치의 중심지가 월성에서 새로운 중심지로 모두 옮겨간 것이다. 반면 이전 신라시대의 중심부는 이후 버려진 성터와 절터 그리고 논밭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왕조교체에 따른 도시의 쇠퇴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경주읍성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경주의 중심부로 역할을 했다. 성의 안과 밖을 구분 짓던 성벽은 헐렸고 방어용 해자(垓子)는 매워졌지만, 성벽을 따라 새길이 생겼다. 그리고 경주 최초의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법원, 경찰서 등의 관공서들이 읍성을 중심으로 들어섰다. 해방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변에 주택지들도 생겼다. 반듯하게 구획된 부지에 깔끔하게 신식으로 지은 양옥집들이 많았던 읍성 동측과 남측의 주택지들은 80년대까지 경주의 대표적인 주거지였다. 큰 변화는 80년대 후반부터 찾아왔다. 늘어나는 인구에 대응하여 경주 북측의 황성동을 비롯하여 동천, 충효, 용강동으로 주거지가 확대되었다. 도시가 성장하면 시가지의 확장은 당연한 순서다. 인구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신규 택지를 조성하면서 공간의 활력이 도시 전체로 확대되던 시기는 여기까지였다. 문제는 만드는 집의 수가 살 사람 수를 넘어서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와 잘못된 예측이 맞물리는 순간 도시 쇠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원래는 외부로부터 인구가 유입되기를 예측하고 외곽에 새 아파트 단지를 지었지만, 결과는 새로운 주민이 아닌 원도심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가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원도심은 당연히 이전보다 사람이 줄게 마련이다. 학생들도 줄었고, 종국에는 옮겨간 사람들을 따라 학교도 이전되었다. 북적이던 원도심 상가는 활력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옮겨간 중심지들이 동천, 황성, 충효, 현곡으로 계속 늘어가고 있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볼 문제는 옮겨간 중심지들도 언젠가는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신경주역세권에 건설 중이던 아파트 단지의 미분양 물량이 높다는 뉴스를 봤다. 인구는 늘지 않는데, 집은 계속 새롭게 대규모로 짓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사람들은 항상 새것에 대한 욕구가 있다. 낡고 오래된 것보다는 깨끗한 새집과 공간이 가져다주는 편익이 큰 것도 사실이다.여기에는 기존의 단독주택지에서는 제공하기 어려운 편리함을 제공할 수 있는 아파트라는 주거유형이 큰 역할을 한 것도 맞다.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아파트 소유가 재산증식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항상 새것을 쫓아갈 수는 없다. 신규 주택지가 생겨나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또 언제 쇠퇴지역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인스턴트식 공간소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한 공간이 오래도록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낡으면 버리고 새것을 쫓기보다는 소중한 공간을 계속해서 아끼고 거듭나게 하는 지속 가능한 공간소비의 문화와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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