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추억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내려진 그 극장 간판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나 달아야겠네 질풍노도의 황홀, 그 시절의 인생극장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뜻밖의 옛 추억을 소환하는 시를 만난다. 그것은 영화가 국민들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6-70년대를 산 시인의 극장편력을 통해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의 추억을 술술 읽히도록 되살려놓은 작품이다. 그 시절 극장이란 무엇인가? 베니어 합판에 그려져 보란 듯이 내걸리던 극장간판의 얼굴 이 몇 날이고 유혹하면, 조숙한 나이로 몰래 입장하여 스펀지가 튀어나온 객석 의자에 앉아 가슴 두근거리며, 비가 추척추적 내리는 듯한 화면을 보곤 했다. 마땅한 공연장이 없던 그 시절, 라디오로 겨우 만나던 가수의 리사이틀도 심심찮게 찾아오고 임시로 설치된 링 위에서 레슬링 경기가 펼쳐지던 곳도 극장이었다. 밀양과 청도가 인접한 곳에 살았던 시인은 삼팔장 파장 무렵 장터마당에서 흐느끼는 뽕짝이 끝나고 상영되던 가설극장,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던 화면에서, 꿈에도 그리던 갸름한 목덜미의 ‘문희’를 만나면서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몇 번 자신을 속여도 좋다고 허세를 부린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설치던 시절, 극장에 대한 관심은 청도 유천에 우뚝 서 있던 국제극장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그는 전설적인 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도 보고, 악역으로 인기를 누렸던 허장강, 관능미 물씬 풍기던 도금봉, 대중을 웃기던 김희갑 출연 영화도 보는데,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이 터져나오는 풍경이라니! 그 ‘도끼’는 ‘talk’의 엉터리 발음인데,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할 때는 나무를 찍는 연장 ‘도끼’로 말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극장에 대한 편력은 비오는 날이면 출몰하던 “범일동 시궁창”의 바퀴벌레들, “갯강구 군단도 못 막”을 정도여서,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로 가득한 삼일극장”, 공돌이들의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던 삼성극장,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던, 쇼로 유명한 보림극장으로 부산의 다양한 순례로 이어진다. 그 영화관도 이제는 다 간판을 내리고, 복합상영관으로, 마트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새것을 아는 재미가 추억을 강제로 밀어내는 시대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일군 인생극장이 그리 쉽게 막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 추억은 우리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 여전히 보금자리를 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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