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만화방창의 봄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가 분주한 봄이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죽어가는 동양란 화분을 분갈이 해보기로 하였다. 역시 시든 난은 물론이거니와 건강해 보이는 난조차 겉보기와 다르게 뿌리가 많이 썩어 있다. 이 축하란이 관리 여부에 상관없이 쉬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1회용, 장식용으로 팔리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이도 일종의 반려식물인데 유통과정에서만 보면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은 하나도 없다.
판매자들이 배양할 때의 식생 그대로 팔아서, 이걸 집이나 사무실에서 기르다 보면 거의 과습으로 죽는다. 과습이 안 되게 하려면 물주기부터 난 키우기가 어마어마하게 까다롭다. 보다 쉽게 키우려면 집에 가져와 우선 난석에다 다시 심어야 한다. 원래 착생식물이기 때문이다. 꽃가게는 이것이 1회용으로 순환해야 소비가 잘 되니까, 쉬 죽는 것에 아무런 계몽이나 교육을 하지 않는다. 일종의 자본주의가 빚은 장삿속이랄까? 화분을 털어내 보면 뿌리가 거의 썩어 있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키워도 생태환경이 나쁘니, 결국 난은 1~2년 안에 모두 죽는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난 산업이 2중화 되어 있어 난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고 또 나름 생명 윤리를 가지고 있을 법한 난 애호가들은 한국춘란을 전문으로 기르고 있다. 결국 축하란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양란이나 양란은 꽃가게의 몫이다.
그런데 난을 전문적으로 판매도 하지만 더불어 건강하게 키워내어야 할 많은 꽃집의 아줌마·아저씨는 난에 대해 지식이 없고 또 알려고도 않는다. 죽든 말든 무관심을 넘어 오히려 죽어줘야 장사가 잘된다고 생각한다.
흔히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양란과 자태와 꽃향기가 좋은 동양란, 이 축하란의 대부분은 대만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해온다. 난석은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고 화분은 중국 또는 베트남에서 수입해오니 1조원에 달하는 난 산업이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큰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춘란 동호인 사이에 한국 춘란을 축하란으로 대체하자는 여론도 있다. 이에 발맞춰 합천군 같은 곳에선 대량으로 재배해 축하란 산업의 일부분으로 만들려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한국 춘란이 가지는 고가의 비용이라든가 장식성 등 여러 특성 때문에 축하란으로 쉬이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 춘란은 동호인 사이에 꽤 큰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가의 작품은 억대가 넘는 것이 있을 정도이다. 잎면 바깥으로 주로 황색과 흰색의 줄이 둘러쳐져 있으면 복륜, 가운데 잎맥을 따라 선이 있으면 호라고 부른다. 밝고 노란색이 잎면 가운데에 넓게 퍼져 있으면 중투, 잎 전반이 얼룩덜룩하면 반이라 하고 이 반이 흩어져 있으면 산반, 정돈되어 있으면 서반이라 한다. 호랑이 무늬처럼 생겼으면 호피반, 뱀무늬처럼 가늘게 점이 퍼졌으면 사피반 등의 이름이 있다. 일종의 돌연변이다.
동호인들이 이 희귀종을 가지고 가격을 매기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필자의 초등학교시절 ‘껌종이 따먹기’하던 것이 생각나곤 한다. 당시의 10원짜리 풍선껌이었던 ‘왔다’ 껌종이는 마치 민무늬 난처럼 너무 흔해서 값이 없다. 대신 예쁘게 디자인된 ‘쥬시후레쉬껌’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아카시아껌’ 껍데기 종이는 학생들의 껌종이 따먹기 내기에서 고가로 거래 되곤 하였다. 희소성이 가격을 좌우한다. 시장이 작동한 것이다. 이 껌종이 놀이는 어쩌면 인간의 삶은 호모루덴스가 당연하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먹거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희귀한 무늬의 그 조그만 난 잎이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향기도 없는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이 피는 그 춘란의 꽃 색에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삶은 분명 이런 놀이의 연장인가 싶다. 이 희귀종의 껌종이를 찾아, 방과 후에 고속도로 휴게소 옆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찾았던 일을 아득히 회억한다. 오랜만에 난 분갈이를 하면서, 썩은 뿌리를 잘라내는 식물 외과 의사놀이로 모두 탕진해버린 휴일 오후가 그다지 아깝지만은 않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