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가 처음부터 바그너스럽지는 않았다. 초기 작품은 이탈리아 전통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던 것이다. 즉, 독창 또는 중창의 유려한 아리아가 중심이었고,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반주기능이 강했다. 특히, 바그너가 파리에서 초연하려고 애쓴 리엔치(Rienzi/1842년 초연)는 작정하고 만든 그랜드 오페라였다. 바그너스럽지 않은 이 오페라는 결국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 불리는 10곡의 레퍼토리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바그너스러운 최초의 오페라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1843년 초연)’이다. 바그너 부부는 빚을 갚지 못해 러시아 국경을 넘는 불법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이후 런던행 배를 탔다가 거센 폭풍우를 만나 노르웨이 해안에 잠시 정박하게 되는데, 바그너는 이러한 경험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영어로 flying Dutchman)은 ‘유령선’의 관용적 표현으로 통한다. 저주받은 유령선은 바다를 영원히 떠도는 운명에 처한다. 7년에 단 한 번 하루 동안만 육지에 내릴 수 있는데, 이때 유령선 선장이 목숨을 바쳐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그너는 하이네의 한 소설에서 여인의 사랑에 의한 (남성)구원에 대해 큰 감동을 받고, ‘젠타(Senta)’라는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여 작품에 투입한다. 결국 젠타는 자기희생으로 유령선 선장의 저주를 풀어준다. 유령선 전설에 여인의 사랑에 의한 구원을 절묘하게 버무린 바그너식 오페라의 탄생이었다. 바그너는 이후 ‘전설’에 기반한 작품을 써내려간다. 탄호이저(Tannhäuser/1845년 초연)는 13세기 실존 음유시인인 탄호이저의 이야기를 각색했다. 여기에 또 다른 음유시인 볼프람 그리고 탄호이저를 사랑하는 엘리자베트가 삼각관계를 이룬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의 ‘선장-젠타-에릭’의 삼각구도와 유사하다. 탄호이저는 노래경연대회 중 쾌락의 장소인 베누스베르크(Venusberg)에 다녀온 사실이 발각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엘리자베트가 탄호이저를 죽이려는 기사들을 막아서고는 영주(대회주최자)에게 구원의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영주는 참회를 위해 로마로 순례를 떠날 것을 탄호이저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탄호이저는 교황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다시 베누스베르크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를 위해 죽는다. 교황의 지팡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기적이 일어난다. 탄호이저가 엘리자베트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로엔그린(Lohengrin/1850년 초연)은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끈 작품으로 중세의 전설에 모티브가 있다. 남동생을 죽인 것으로 누명을 쓴 엘자가 죽음의 위기가 처하자 백조가 끄는 배에서 내린 은빛갑옷을 입은 기사가 엘자를 구하고 둘은 결혼(3막 초반의 혼례의 합창)한다. 그런데 결혼 전에 백조의 기사는 엘자에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묻지 말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엘자가 금기를 깨버리자 기사는 “내 아버지는 성배의 수호자 파르지팔이고, 나는 성배의 기사 로엔그린이다.(아리아 im fernen land)”라고 말한 후 떠난다.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아야 기사의 성스러움이 유지되는데 엘자의 금기위반으로 더 이상 성스러움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엔그린 전의 세작품은 모두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지만, 로엔그린은 드레스덴 혁명(1849년)으로 바그너가 지명수배 중이었기에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서 초연했다.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이 작품을 보고 바그너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바그너의 일생일대의 꿈은 자신의 극장(바이로이트 극장)을 짓는 것이었는데, 바로 루트비히 2세가 극장건립을 후원하여 꿈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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