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문무대왕면 소재지를 지나 한참을 가면 왼쪽으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얼마간 더 가면 대본삼거리이다. 오른쪽 대종교를 건너지 말고 감포 쪽으로 150m 가서 오른쪽 회 단지 쪽으로 내려가면 고고미술학계의 거장인 우현 고유섭과 그의 수제자인 초우 황수영과 수묵 진홍섭 등 개성삼걸(開城三傑)의 현창비가 있다. 우현 고유섭이 인천 출신으로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당시 개성 출신의 초우 황수영과 수묵 진홍섭은 우현의 수제자였다. 이들은 우리 고고학계를 개척한 분으로 개성삼걸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의 고고학 연구는 대부분 신라 유적 중심의 연구로 삼산오악조사단을 이끌고 이곳 대왕암을 비롯한 신라 유적조사연구에 진력했으니 경주삼걸이나 서라벌삼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후 초우의 제자인 호불 정영호를 기리는 현창비가 또 이곳에 세워지게 된다. 호불은 생전에 우현 고유섭으로부터 시작된 한국미술사 학풍이 초우 황수영을 통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항상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이곳 대왕암과 석굴암 등 수많은 신라유적을 조사하여 신라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현선생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1974년이었다. 1939년 고려시보에 이와 같은 글이 실렸다.
“경주에 놀면 불국사에 노닐 줄 알고 석굴암을 누구나 찾지만 다시 석굴암의 산골짜기를 끼고 가는 물줄기를 타고 가기 육십여리, 이 대종천 하류에 이르면 펑퍼짐한 언덕, 그곳에서 푸른 파도는 벌써 보이기 시작하는데, 용당 산하에 버려진 감은사지의 고고한 삼층석탑, 그곳에서 다시 나와 바다로 향하면 대왕암의 엄숙한 자태, 무심한 갈매기는 파도와 함께 조용히 날아가는데 파도에 떠 있는 일엽편주는 바람결에 던저져 있고 …… 바다의 향기는 숨어들고 솔바람 소리는 귀에 들려온다. 그래서 이곳 바다를 나는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비명(碑銘)이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되었다. 이 비의 뒷면에는 우현의 시 ‘대왕암’의 일부가 음각되어 있다.대왕(大王)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저 바위 저 길목에숨어 들어 계셨다가해천(海天)을 덮고 나는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우현 고유섭 전집 9권에 실린 이 시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국지성(憂國至誠)이 중(重)코 또 깊으심에불당(佛堂)에 들러시다고대(高臺)에 오르시다후손은 사모하야용당(龍堂)이여 이견대라더라(이하생략)다음은 우현선생의 ‘경주 기행의 일절’이라는 수필에서 대왕암과 관련된 내용이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태종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기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다음은 20세기 초 미국 흑인사회의 대표적 지성이었던 W. E. B. 뒤부아(DuBois)가 한 말이다.
“교육은 사람을 목수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목수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성3걸과 호우는 목수를 사람으로 만든 분이었으나 평생을 교육에 몸담아온 필자는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