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수많은 부윤 위정자(爲政者)가 경주고을을 다스렸고 교육과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윤은 옳은 판단과 결정으로 백성의 안위를 살펴야 마땅하지만, 지난날 그들의 잘못된 행실로 부윤에서 파직되기도 하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부윤의 부재와 백성의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339명의 부윤이 교체될 정도였다니 참으로 괴이하고도 슬픈 현실이다. 비단 경주고을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부윤의 다스림은 오래도록 덕망이 이어져 칭송받아 대대로 가문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가끔은 지난날의 과오로 인해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처신해야 할 자리였다. 인조 12년 1634년 2월 9일, 비국(備局)이 “지금 체부(體府) 종사관 박황(朴潢)의 치계를 보니, 경주부윤 박홍미(朴弘美. 재임1633.07~1634.02), 흥해군수 이식립(李植立)은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한 정황이 있습니다. 그들의 파직을 청합니다.”라며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한 일을 아뢰었다. 박홍미는 1603년 생원시를 거쳐 1605년 문과에 급제하며 병조좌랑․사간원 정언·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강화도 함락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중풍으로 양양부사 직분을 내려두었다고 한다. 현종 6년 1665년 8월 18일에는 경주고을의 이만(李萬)이 아비를 시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만고에 없던 변고였기에 경주부윤을 강등하여 부사(府使)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파직 처리된 적이 있었다. 미뤄보면 아마도 심세정(沈世鼎, 재임1664.08~1665.08)이 부윤으로 있던 시절로 판단되며, 이는 경주라는 큰 고을의 중책에 맞게 오륜의 법도 역시 중하게 다룬 것으로 보인다. 숙종 20년 1694년 12월 16일에 지평 김덕기(金德基)가 “경주부윤 손만웅(孫萬雄. 재임1693.11~1694.12)은 탐욕스럽고 외람되며 또한 이서(吏胥)를 절하여 맞이하는 짓을 하여 오래도록 관리된 자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라며 고한 일이 있다. 갈암 이현일은 목사와 군수 등을 두루 역임한 손만웅을 후학양성과 나랏일 걱정이 빼어나다며 만사(輓詞)에서 언급하였지만, 우암 송시열이 포항 장기로 유배왔을 당시에 장기현감을 맡은 손만웅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 모습이 보인다. 실록의 기록이라도 모두가 옳은 판단의 기록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정치상황과 당파 등 복합적인 상황에서 종합적으로 들여다봐야하지만 가끔은 당파에 치우친 모함과 오판의 일도 종종 있었다. 숙종 42년 1716년 5월 12일 사헌부에서 “경주부윤 정필동(鄭必東. 재임1715.08~1716.06)은 본디 용렬하고 자질구레한 사람으로 권문세가에 아첨하여 몸소 경멸하는 일을 맡고, 외람되게 서읍(西邑)에 제수되어서는 탐욕의 비난을 받았으니, 본직(本職)의 제수는 인망(人望)에 크게 벗어납니다. 읍비(邑婢)를 현혹해 해괴한 일을 많이 하였고, 본부(本府)에서 설치한 삼전(蔘田)은 진공(進供)의 수요에 대비한 것인데 약에 쓴다는 핑계로 절차를 무시하고 캤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대로 둘 수가 없기에 파직을 청합니다”라며 부윤의 파직을 아뢰었다. 숙종은 경주부윤 정필동의 파직을 쉽사리 윤허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파직시켰지만, 경주부윤 파직 이후에 특명으로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한다. 이에 스스로 사직을 고하지만 숙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점을 미뤄보면 숙종과의 관계가 긴밀하였음을 짐작케한다. 당시 여자종을 함부로 취하고, 공물인 산삼 등을 사적으로 도용하고도 가볍게 넘어간 일을 보면 권력의 무서움이 사뭇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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