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바그너는 고전(古典)을 탐닉했다. 그에게서 독일계 선배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영재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릴 적 방대한 독서량은 훗날 그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바그너는 따로 대본작가를 두지 않고, 직접 대본을 썼다. 그는 대기만성형의 예술가였다. 차곡차곡 쌓인 내공이 한꺼번에 분출하여 19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바그너의 20대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도 우연이었다. 4살 연상인 배우 민나 플래너(M.Planer/1809-1866)와 21살에 만나 23살(1836)에 결혼했다. 민나에게는 이미 나탈리라는 딸이 있었다. 불과 15살 때 군인과 불장난을 하다 낳은 자식인데, 남들에겐 동생이라 하며 키웠다. 민나는 바그너와 결혼 후 1년 만에 다른 남자와 도망치기도 했다. 바그너가 과연 이런 여자에게 무슨 정이 있겠냐 싶겠지만, 그래도 힘든 시절은 온전히 그녀가 함께 했다.
1839년 바그너는 민나와 함께 파리행을 결심한다. 당시 바그너 부부는 러시아 리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려는 일은 안 되고 빚은 점점 늘어났다. 파리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러시아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한 상태라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다. 먼저 프로이센으로 넘어가 영국으로 가는 작은 배를 탔다. 이때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는데, 바그너는 이 테티스호에서의 무서운 경험에서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모티브를 찾았다고 한다.
바그너는 결국 런던을 거쳐 파리에 당도하기는 했지만, 그가 생각한 만큼의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진 않았다. 파리만 가면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많을 것이고, 돈을 많이 벌어 빚을 청산해야겠다는 바그너의 계산은 산산조각이 났다. 프랑스 그랑토페라의 대가 마이어베어의 추천장도, 사교왕 리스트의 소개도 파리에선 소용없었다. 이 자존심 강하고 무뚝뚝한 독일 남자는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다만,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바그너가 오랫동안 준비한 오페라 리엔치(Rienzi)가 드레스덴에서 초연(1842)하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아무튼 바그너 부부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고, 리엔치는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바그너는 리엔치의 성공이 못마땅했다. 작품에 마이어베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843년에는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초연에 성공한다. 리엔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지만, 바그너에게는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드레스덴 궁정의 악장으로 취임한다. 딱히 마음에 드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20대 내내 빚에 허덕이며 떠돌던 차라 거절할 수 없었다. 바그너는 나이 3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정수입이 있는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845년에는 오페라 ‘탄호이저’를 초연하고, 음악평론가 슈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후 바그너는 독일 전설에 기반을 둔 ‘로엔그린’을 준비한다. 그런데 로엔그린 초연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드레스덴에 혁명이 발발(1849)한다. 바그너는 궁정악장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가담한다. 하지만 혁명군은 작센에 투입된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비참하게 진압되었고, 바그너는 스위스로 망명을 한다. 불과 6년 만에 바그너는 다시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