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부는 신라의 천년고도로 935년 고려 태조년간에 ‘경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동경·계림·동도 등으로 불리며 수많은 시인묵객이 다녀간 명승이자 회재 이언적 등 학자의 고을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영남웅부(嶺南雄府)의 경주는 마땅히 현명하고 부지런한 관리가 부임해 잘 다스려졌으나, 사리사욕·경거망동·부정부패 등 다소 부도덕한 부윤도 있었으니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본다. 성종 2년 1471년 8월 23일에 사헌부 장령 홍귀달(洪貴達)이 “경주부윤 전동생(田秱生. 재임1469.03~1471.09)은 그 첩이 죽자 경 내에 장사지내고 향리에게 재(齋)를 마련하게 하고, 또 돌로 사람의 형상을 설치하고 표석을 세우는 등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았으며, 또 성주(星州)의 어떤 여자는 아비가 죽어서 장사도 지내기 전에 전동생이 강제로 취하여 처로 삼았습니다. 사리를 아는 재상으로서 이같이 행동하여 풍속을 더럽히고 허물어뜨렸으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주는 큰 고을인데, 부윤이 탄핵을 당하면 관가의 일이 반드시 허술해질 것이니, 청컨대 그를 파직하소서”라며 파직을 청하였다. 전동생은 전흥(田興,1376~1457)의 아들로, 판승문원사, 첨지중추원사,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경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풍교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으며, 형제인 전수생(田穗生) 역시 음서로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근신할 줄 모르고 불의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다가 유배당하였다. 특히 전동생은 왜통사(倭通事) 최웅(崔雄)의 처를 취하여 첩으로 삼고, 최웅의 재산을 다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가 최웅의 족친에게 고소를 당하는 등 사림에서도 그를 비루하고 염치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훗날 홍귀달(재임1486.09~1489.02)은 부친 봉양을 위해 경주부윤을 자청하였다. 명종 8년 1553년 9월 19일에 사헌부에서 “원주목사 이순형(李純亨)은 경주부윤(재임1552.04~1552.12)이 되어서는 관인들을 많이 데리고 금천(衿川)에 오가며 부리면서 집을 지었는데, 관인들이 오래 머물게 되어 옷을 팔아서 먹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실어온 물건들이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일일이 다시 징수하여 받았고, 본 고을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또 수령을 시킨다면 필시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 것입니다. … 모두 파직하소서”라며 파직을 고하였다. 덕수이씨 이순형은 152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괴산군수·청주목사·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성품이 경박하고 망령되어 가는 곳마다 은혜를 팔아 명예를 구하였기에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추잡하게 여겼다고 기록한다. 선조 7년 1574년 2월 5일에 간원(諫院)에서 “경주부윤 양응정(梁應鼎. 재임1578.02~1578.05)은 인물이 거칠어 앞서 진주목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한 일이 많았고, 사람들이 모두 침 뱉고 더럽게 여기니 이번에 모든 백성에게 임하는 관원이 될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라며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잘못을 캐물었다. 제주양씨 양응정은 시문에 능하였고, 1540년 생원시, 1552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조참판·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경주부윤으로 재임 중에 진주목사 시절 청렴하지 못하는 일로 짧은 임기를 끝으로 파직되었으며, 157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선조 39년 1606년 6월 29일에 경주부윤 김영남(金穎男. 재임1606.05~1606.07)을 탄핵하는 사간원 상소문을 보면 “김영남은 2품의 수령으로 당초에 탄핵을 받고서도 뻔뻔스럽게 부임하였으니, 후안무치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부임한 뒤 술에 빠지고 형벌을 함부로 쓰는가 하면 정사를 하급관리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영남의 큰 고을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라 상소하였고, 그대로 행하였다. 광산김씨 김영남은 1572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익산군수·배천군수·죽산부사·황해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정사에 치밀하지 못해 배천군수에서 파직되는 등 인물 됨됨이가 용렬하였다. 경주부윤 부임 당시에도 요직의 책임과 탄핵을 받은 뒤에도 부임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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