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은 음악사에서 두 명의 천재가 태어난 특별한 해다. 한 사람은 오페라의 왕 베르디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그너다.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가 주도한 19세기 초반의 벨칸토 오페라는 성악 중심의 장르였다. 특히 초절기교의 소프라노는 벨칸토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성악보다 오페라의 내용이 중시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리브레토(libretto)라 불리는 오페라 대본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오페라에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다.
온건파는 대본이 중요하므로 성악을 자제한 채로 기존 오페라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통성을 이어가려는 베르디가 그러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작품들이 오페라에 대거 원용되었다. 아리아는 여전히 오페라의 중요 구성요소였지만, 벨칸토 오페라만큼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반주기능에 충실했다. 결론적으로 오페라 내용(대본)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지만, 성악을 압도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한편, 바그너는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바그너에게 대본은 문학(文學)이고 시(詩)다. 대본을 위해 음악은 봉사해야 한다. 그래서 성악이 도드라지는 것을 경계한다. 독창이든 중창이든 합창이든 아리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레치타티보 풍(風)의 노래가 극을 이끌어 갈 뿐이다. 바그너에게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다. 주제를 암시(Leitmotiv)하며 무제한으로 선율을 제공한다. 바그너에게 이러한 종합예술을 음악극(Musik Drama)라 명명했다. 음악극은 기존 오페라의 전통을 무너뜨린 혁신적인 장르였다.
바그너(R.Wagner/1813-1883)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바그너 가문에 예술과 관계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바그너의 부친인 프리드리히(F.Wagner/1770-1813)가 예술애호가였다. 그의 직업은 경찰이었지만 가이어(L.Geyer/1779-1821)라는 화가를 후원했다. 가이어는 바그너의 집에 자주 놀러 와서 바그너의 모친인 요한나(J.Wagner/1774-1848)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훗날 프리드리히가 죽자 다음해(1814년)에 가이어와 요한나는 결혼을 한다. 다소 황당한 일이지만, 바그너의 나이 한 살 때의 일이라 전혀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이어는 어린 바그너에게 예술적 영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록 바그너가 8살이 되던 해(1821년)에 단명하고 말지만, 살아생전 바그너에게 준 일생일대의 선물이 하나 있다. 당시 드레스덴의 궁정악장이었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C.M.von Weber/1786-1826)를 소개시켜 준 일이다. 어린 바그너에게 베버는 영웅이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단연 최고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8살 소년 바그너는 베버의 기념비적인 오페라 ‘마탄의 사수’(1821년 초연)를 피아노로 연주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버와의 인연도 오래가지 않았다. 베버가 40세의 나이(1826년)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훗날 바그너가 장성하여 드레스덴의 음악감독이 되었을 때(1843년), 그는 베버의 유해를 런던에서 드레스덴으로 옮겨오는 일을 감행했다. 어린 시절 영웅에 대한 바그너의 충정이었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새 지평을 열었던 베버는 비록 독일 오페라사에서는 영원한 2인자가 기록되겠지만, 바로 그 1인자가 바그너이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잠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