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대한민국을 기습침략 교란할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남침용 군사 통로(땅굴)를 만들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땅굴은 총 4개이며, 발견된 땅굴은 순서에 따라 제1, 제2, 제3, 제4땅굴로 명명되었다.
제1땅굴은 1974년 11월 5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 육군 수색조가 수색 임무를 수행하던 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발견하였다.
높이는 1.2m, 너비는 90cm, 지하 2.5∼4.5m, 길이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또 1975년 3월 19일에 강원도 철원군 근등면 북한 군사분계선에서 너비와 높이 2m, 길이 3.5km, 지하 50∼160m인 제2땅굴을 우리 군과 주한 미군의 공병대가 탐사하여 땅굴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978년 10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의 DMZ에서 남쪽 400m, 판문점 남방 4km 지점에서 너비와 높이 2m, 길이 1635m, 깊이 73m인 제3땅굴이 발견되었다.
198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Christmas Eve)에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동북쪽 26km 지점에서 북한군들이 뚫어놓은 4번째 땅굴이 발견되었다.
제4땅굴은 군사분계선 남쪽 1502m 지점에 폭 2m, 지하 145m, 전체 길이 2052m임을 확인했다. ​국군은 역 발굴 작업으로 땅굴의 탐색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90년 3월 3일에 북한군의 땅굴과 관통되자 땅굴 내부 수색 및 북한군 소탕 작전을 계획하였다. 제1땅굴 수색 및 북한군 소탕 작전으로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하여 국군 장교 1명과 미군 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다치는 참변을 당했다.
제2땅굴 수색 작전에서는 김호영 중사 등 8명이 북괴가 설치한 부비트랩에 의해 순직했을 정도로 땅굴 수색 작업은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다.
제4땅굴을 탐색하기 위한 수색 작전에는 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수색팀과 군견 한 마리가 참여하였다.
이 군견이 ‘헌트(Hunt dog)’이며 저먼 셰퍼드 품종으로 당시 나이는 4살이었다. 헌트의 임무는 수색대원들보다 앞서 땅굴로 들어가 북한군이 설치한 부비트랩과 폭발물, 유독가스 유무를 사전에 확인하여 수색대원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헌트는 나무가 우거진 산악지대에서 단숨에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으며, 시속 60~70km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훈련된 군견이었다.
헌트(Hunt)는 수색대와 함께 제4땅굴로 진입하였고, 수색대원들보다 한발 앞서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접근했다. 군사 분계선을 330m 앞에 두고 대원들은 헌트(Hunt)의 이상 행동과 움직임을 포착하고 수색을 중단하였지만, 헌트(Hunt)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땅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헌트(Hunt)는 축축하고 어두운 땅굴 속에서 북한군이 설치한 폭발물의 화약 냄새를 맡고 이를 대원들에게 알리려는 순간에 북한군이 설치한 또 다른 목함지뢰(1930년대 말에 소련에서 개발한 나무상자 안에 TNT 폭약과 같은 폭발물이 들어있는 지뢰)를 밟고, 1990년 3월 4일 12시 05분 그 자리에서 산화하였다.
만약 헌트(Hunt)가 앞서 나가지 않았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부비트랩이 설치된 폭약이 폭발하여 수색대 분대원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을 것이다.
장렬한 산화로 임무를 수행한 헌트(Hunt)는 1990년 4월 1일 유해가 수습되었고, 제4땅굴 앞에 묘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죽음으로 장병들을 구하고 조국을 위해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헌무공훈장(仁憲武攻勳章 : 우리나라 5등급 무공훈장이며, 전투에 참여하여 용감하게 싸운 공적이 뚜렷한 유공자에 수여하는 훈장이며, 인헌(仁憲)은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시호이다.)’을 받고, 군견으로써는 최초로 ‘소위’로 추서되었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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