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1일부터 4박 6일간의 일정으로 공무출장을 다녀왔다. 필자의 공직생활 마지막 출장지는 일반인이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Dhaka)였다. 싱가폴을 경유하여 도착한 시간은 21일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도록 환영해 준 건 손목과 목덜미를 향해 쉴새 없이 날아드는 방글라데시 모기들이었다.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공항 대합실과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찬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치 7~80년대 우리네 부모님 세대가 독일, 중동국가로 파견되었듯 방글라데시의 인력 회사들은 싱가포르, 중동, 한국 등으로 떠나보낼 노동인력들을 몇 개 그룹으로 나눠 출국시키고 있었다. 그 많은 인파들은 이들을 환송하기 위해 모인 가족과 친지들이었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공항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우리 대표단을 태운 차량은 어느새 왕복 4차선 도로를 곡예하듯 달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우리가 묵을 호텔(Dhaka Regency Hotel)까지 직선거리로 5분 거리인데도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를 꽉 메운 차량, 오토바이, 릭샤, 자전거가 공존하며 매연과 경적이 울리는 가운데 4차선 도로를 6차선처럼 사용하는 모습에서 숨쉬기 힘들 정도의 매연과 무질서 그 속에서도 물 흐르듯 하는 교통 흐름을 보며 생동감 넘치는 도시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같이 간 동료의 말을 빌자면 ‘공무출장이 아니면, 도무지 자비 들여 올 수 없는 곳’을 무탈하게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어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이번에 다녀온 ‘다카’는 명과 암이 확연하게 교차하는 방글라데시의 현주소를 볼 수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가 6번째 투자국가인 동시에 경제성장률이 높은 국가다. 마침 이번 방문기간이 한-방글라데시 수교 50주년이었다. 그곳에서 작게나마 내 마지막 공무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하니 그 역시 의미 깊게 여겨졌다. 출장 보고서 작성 등 후속 조치를 끝내고 부서장에게 제출할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퇴사일에 전직원에게 보낼 퇴직의 변을 미리 작성하여 임시 저장할 요량으로 그간 정들었던 PC 앞에 앉았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24년의 군 생활 이후 자비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재취업하게 된 직장은 하나님의 부르심 - 직업(vocation)이라는 단어는 희랍의 voc 즉 to call이라는 의미 - 이란 의미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때론 직장에서 요구하는 일들이 하찮게 여겨질지라도 내가 가진 한두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하여 그 일을 마무리했다. 소위 586세대인 필자가 90년대 이후 태어난 MZ세대와 함께 실무자로 근무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할 때도 있었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며 나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쉴새 없이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석증과 대상포진을 달고 살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지난 6년을 돌이켜보면, 나 자신의 의(義)를 드러내려고 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젊은 나의 동료들 역시 나와 근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나 미안함이 앞선다. 필자는 퇴직의 변 마지막 부분을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가요인 석별의 잔(The Parting Glass)를 적어내려 갔다. 그 요지는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나로 인한 것이며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석별의 잔을 바친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헤어짐을 겪으며 살아간다. 한용운 시인의 회자정리에 동양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면 아일랜드 가요 ‘이별의 잔’에는 떠나는 이의 아량과 담백함이 들어있었다. 오늘 저녁 뉴스에 진주 매화꽃 소식이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새봄, 이제 보름 후면 지난 30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인생 3막을 지구의 맨 서쪽 ‘땅끝’ 아일랜드에서 K-Culture의 전령사로서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그동안 보잘것없는 필자의 글을 읽어 주신 경주신문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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