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경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일근 시인이 감은사지를 들러보고 읊은 시이다.감은사지 1탑은 달을 꿈꾸었는지 몰라버려진 세월의 뱃속 가득 푸른 이끼만 차고변방(邊方)의 돌들의 이마는 시나브로 금이 갔다.그 금 사이 무심한 바다가 들여다보곤 돌아갔다.천 년(千年) 전 바람은 피리구멍 속에 잠들었고신화는 유사(有史) 행간 사이 숨어 버렸다.문득문득 사라진 절의 풍경(風磬)소리 들리고항아리마다 칠월 보름달이 떠오를 때저기 사랑하는 신라 여인이 긴 회랑(回廊)을 돌아간다.탑 속 빈 금동사리함에 누운 잠아천년(千年)의 사랑아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다면......돌 속에 묻힌 혀는 무겁기만 한데항아리 속에서 떠오른 누우런 달이둥근 맨발로 걸어 탑 속으로 숨어든다.어허 탑마다 즐거운 만삭(滿朔)이다.내가 탑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고 하지만 아무리 공을 들여 세운 탑이라고 해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감은사지 이 쌍탑도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상흔을 남기고 있다. 그래도 바다의 냄새가 배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풍경소리가 들리고 탑돌이를 하는 신라 여인이 어른거린다. 이 석탑은 196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은 백제에서 찾아지지만, 전형적인 석탑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통일신라 직후이다. 이때 조성된 이곳 감은사터 동서 3층 석탑이나 고선사터 3층 석탑에서 층수를 3층으로 하였다는 것은 『조탑공덕경』에서 ‘탑을 세우려면 그 형상은 높고 묘하여 3계를 지나게 하라[其狀高妙出過三界]’ ‘표찰은 범천까지 이르게 하라’ ‘윤개는 대천세계를 덮게 하라’는 것 등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높이는 각 13.4m이고, 동서의 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양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로 되어 있으며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가 3주(柱)씩 있다. 갑석도 12장의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형과 각형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도 면석이 12장의 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있는 외에 탱주가 2주씩 있다. 갑석 중앙에는 각형의 2단 굄이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층기단의 아래쪽 주위에는 일정한 너비의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탑을 돌 수 있도록 하였다.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 부마다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부는 적심석으로 메워져 있으나, 3층 탑신만은 석재가 하나인데 이는 사리장치를 매납하기 위해서이다. 초층 탑신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따로 만들어 맞추어 세웠으며, 2층 탑신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장으로 조립되어 있고, 1장으로 조성된 3층 탑신에는 각 면 양쪽의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낙수면 부분과 받침 부분을 별개의 돌로 조성하되 각각 4장으로 짜여져 있다. 받침은 각 층 5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노반만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고 그 위의 상륜부는 멸실되었다. 노반 위로 보이는 찰주의 높이는 3.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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