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념                                                                    황성희 고양이에게는 고양이가 전부이다 그것은 제가 어느 입간판 속에 갇힌지도 모르면서 아무 의심 없이 제 옆에 놓인 사료 봉지를 쳐다본다 저의 머리가 언제나 오른쪽으로 기운 것도 모른 채 저의 혓바닥이 행인의 담뱃불로 지져진 것도 모른 채 한번도 돌아본 적 없는 왼쪽의 세계에 대한 무지 아닌 무지와 달관 아닌 달관의 표정으로 결코 제 입속으로 떨어져지지 않을 공중의 간식을 향해 평생 한 가지의 눈빛과 부동하는 한 자세를 선보인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한 의문을 키우지 않는다 하늘을 의심하는 일이 하늘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술을 먹고 입간판을 걷어차 본 자식들은 알 것이다 아무도 고양이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고양이를 조각조각 부숴볼 수는 있지만 고양이에게 이 세계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수와 진보의 알레고리, 고양이 ‘단념’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림’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고양이 사료 가게의 입간판에 붙어 있는 “제 옆에 놓인 사료 봉지를 쳐다”보는 그림을 소재로 한 이 시에서 무엇을 단념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작품이 단순히 고양이 이야기를 아니고, 고양이는 알레고리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된다. 첫 줄 “고양이에게는 고양이가 전부이다”라는 말부터 심상치 않다. 고양이는 고양이 바깥에 뭐가 있나? 자신을 탈출할 방법은 없는가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입간판이라는 강고한 물체 덩어리에 갇혀 있는 고양이. 우리는 이것이 편향의 세계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오른쪽으로만 보고 있는 고양이 사진 “저의 머리가 언제나 오른쪽으로 기운 것”은 고정된 세계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생리이자 양태이다. 그러나 그 사실마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 더 놀라운 것은 “한번도 돌아본 적 없는 왼쪽의 세계”라는 말이다. 보수든 진보든 다른 쪽은 없다는 듯, 자신의 너머를 보지 못한 채 치우쳐 기울면 문제가 된다. 저들은 “저의 혓바닥이 행인의 담뱃불로 지져진 것도 모”르는 입간판 속의 고양이와 무엇이 다른가? 상대방이 이야기엔 귀도 열지 않은 채 “무지 아닌 무지와 달관 아닌 달관의 표정으로” 있는 고양이와 같은 통속이 아닌가? “결코 제 입속으로 떨어져지지 않을 공중의 간식”이라는 달콤하고도 공허한 유혹,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교묘한 규율이라니. 그 작동장치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한 의문을 키우지 않는다”. 이를 시인은 “하늘을 의심하는 일이 하늘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엉뚱한 비유로 받아친다. 하늘마저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평생 한 가지의 눈빛과 부동하는 한 자세를 선보”이는, 자신의 몸이 해체될지언정 “고양이를 조각조각 부숴볼 수는 있지만”, 다른 세계를 못 받아들이는 치우친 보수와 치우친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에 물든 고양이들! 제목에서 시인은 단념한다고 했지만, 역으로 순종적인 고양이 속에서 저항의 제스쳐를 읽어낼 날을 기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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