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지(望德寺址)에서의 상념(2) - 박재상, 김인문 그리고 樂鵬龜 (신라의 外交史)
11월 28일 오후.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우산을 쓰고 망덕사지(望德寺址)를 다시 찾았다. 남천 제방 둑의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표시석 앞에 섰다. 신라 충신 박재상이 일본국으로 떠날 때 그의 부인이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넘어져 길게 절규했던 까닥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불렀고,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다리를 뻗치다’의 뜻으로 ‘벌지지(伐知旨)’라 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장사 벌지지’ 표시석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50 여미터 앞쪽에 망덕사지가 보이고, 제법 저만치에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의 남쪽 봉우리가 이제 막 멈춘 빗줄기에 화답하던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마치 선덕왕이 소망했던 ‘도리천 궁전’을 연상 시킨다. 망덕사지 가는 논둑을 걸으면 곳곳에 방치된 벼 이삭을 많이 발견한다. 어릴 적엔 한 톨의 벼 이삭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가족이 밤이 늦도록 고개를 숙여 주웠건만, 농사 짓는 일이 별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은 요즈음엔 어지간한 벼 이삭은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안타깝다. 어려운 경제에 점심밥 굶는 어린이가 많다는데, 차라리 전국적으로 벼 이삭줍기 운동이라도 펼치면 어떨까? 산에 들어가면 나무는 보되 숲 전체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남산 속에 들어가거나, 낭산 선덕왕릉 근처에 들어가면 양 사방 나무에 가려 주위 경치를 보기가 어렵고 방향도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망덕사지에서 사방을 둘러보라. 남산, 마석산, 치술령, 형제봉, 토함산, 낭산으로 병풍쳐진 풍경이 너무나 정겹다. ‘장사 벌지지’ 표시석을 보면 충신 박재상이 떠오르고, 낭산의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를 보면,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과 의상대사 그리고 당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떠오른다. 이들은 신라시대의 국제외교사(國際外交史)에 중요한 등장 인물들이다. 고구려에 볼모로 잡힌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뛰어난 외교화술로 구출하고, 뒤이어 일본에 볼모로 잡힌 눌지왕의 또다른 동생인 미해를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던져버린 신라충신 박재상. 오랫동안 당나라에 사신으로 있으면서, 신라와 당나라간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에 일조하였고, 통일 후 신라를 치려던 당의 음모를 미리알고 의상대사로 하여금 문무왕께 아뢰게 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 사천왕사에서 명랑법사등이‘문두루비밀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바다에 침몰시킨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당고종이 파견한 사신을 따돌리려고, 급히 새로 지은 절을 보여 주였더니,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며 끝내 들어가지 않는 당나라 사신 악붕귀를 금 천냥으로 매수하여 위기를 넘긴 신라인들의 외교지혜가 고스란히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국익을 위해 외국 외교관(악붕귀)를 돈으로 매수한 `사상 최초의 국제 돈로비 사건`일 것이다.그런데 낭산 도리천에 잠들어 계신 선덕왕때부터 태종무열왕 문무왕 시절의 삼국유사나 삼국유사 기록을 자세히 읽다보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배경에는 화랑도를 훈련시킨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뛰어난 외교전략이 더 큰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사실 좀 무력이 약했던 신라가 당나라라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삼국통일을 이룬 것은 바로 국제정세의 힘의 변화를 적절이 활용한 뛰어난 외교전략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교적 역량의 선두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큰 활약을 하였고, 망덕사가 가짜 사천왕사임을 당나라 사신이 눈치를 차리자, 금 천냥이라는 거액의 뇌물을 주어가면서까지 당나라 외교관 악붕귀를 매수하여 국가적 위기를 헤쳐나간 신라의 지혜(?)가 돋보인다. 화려한 외교술로 볼모로 잡혔던 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신 외교관 박재상의 혼이 ‘장사 벌지지’ 표시석에 아직 서려있는 듯하다. 망덕사에 가면 눈에 보이는 유적보다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는 유산이 더 많다. 힘이 아닌 외교술을 지렛대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의 지혜가 느껴진다. 그리고 충신 박재상의 마지막 발자욱과 그 부인의 몸부림 자욱이 고이 묻혀있는 長沙 모래사장도 보일 것이다. 망덕사지는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그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매력적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