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노천박물관 룩소] 고대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룩소는 어쩐지 경주와 닮은 데가 많았다. 도시전체가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며 수천년에 걸친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는 고도의 정취가 살아있는 도시였다. 카이로에서 500km거리의 룩소는 ‘파라오시대’로 일컫는 가장 강력한 왕권과 태평성대를 누렸던 고대이집트 신왕조시대의 도읍지다. ‘테베’라고 불리던 기원전 1천500년경에는 인구 1천만 명을 넘는 대도시였다. 소설 람세스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람세스2세도 이곳에서 66년간 파라오로 활약했었다. 룩소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안에는 카르낙, 룩소 등의 신전과 도시를, 서안에는 왕, 왕비, 귀족 등의 석굴무덤의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를 건설했다. [파라오들의 공동묘지 왕가의 골짜기] 왕가의 계곡은 알쿠른산 일대에 만들어진 동굴식무덤 양식의 공동묘지이다. 피라미드로 착각할 정도로 꼭대기부분이 피라미드를 빼닮은 이 산과 주변 계곡에 왕의 계곡, 왕비의 계곡, 왕자, 귀족들의 무덤, 장제전 등을 만들고 그야말로 ‘죽은 자들의 도시’(네크로폴리스)를 건설했다. 풀 한포기 없는 산과 계곡은 마치 한창 공사 중인 골재채취장을 방불케 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렇지 여기저기에 쌓인 거대한 흙무더기에서 토사가 마구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왕가의 계곡은 이러한 흙더미(?)들로 이루어진 골짜기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주차장과 손에손에 물건을 들고 관광객들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상인들이 먼저 반겼다. 거기서부터는 전동수레를 타고 올라갔는데 불과 1km 밖에 안 되는 거리였는데 누구나 타고가게 유도했다. 왕의 무덤들은 산허리에서 굴을 파 내려가 방을 만드는 암굴식 무덤양식이었다. 완만한 경사도(약 15%)에 폭2m, 높이 3m, 길이 약 70m의 복도식 석굴무덤의 벽면과 천정에는 화려한 벽화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파라오들은 재임기간동안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때문에 대부분 미완성의 무덤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오히려 무덤의 조성과정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무덤은 , 그중 일부만 개방하고 있었다. 1822년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총 64기의 피장자는 물론 그들의 주요 치적들까지 모두 밝혀졌다고 한다. 신라천년의 56왕, 수많은 귀족들의 무덤 가운데 불과 몇 기를 제외한 대부분은 정확한 소재조차 모르고, 왕관이 출토되었어도 피장자가 누군지조차 밝히지 못해 답답한 경주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들의 기록문화가 부럽다. [고대이집트 최초의 여왕 핫셉슈트 장제전] 왕의 골짜기를 나오면 무덤을 만들었던 기술자들의 마을이 있다. 도굴꾼으로 변신한 기술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그 후예들이 대대로 도굴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나일강이 굽어보이는 산기슭에 마치 현대식 호텔 같은 4층짜리 핫셉슈트장제전이 나온다. 현존하는 가장 큰 제전으로 한창 복원 중에 있다. 남편 투트모세2세가 죽자 어린 서자 투트모세3세를 섭정하다가 남장에 수염까지 달고 스스로 파라오에 오른 최초의 여왕 핫셉슈트가 시아버지 투트모세1세와 자신의 부활을 위해 이 장제전을 지었다고 한다. 합세슈트의 벽화들이 섭정과 구박에 원한을 가졌던 서자이자 후임 왕 투트모세3세에 의해 난도질당한 모습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맨 위층에서 쳐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경관은 가히 일품이었다. 이곳에서도 1km 전방에 제전까지 전동수레를 운행했다. [아메노피스3세의 멤논 거상] 장제전을 뒤로하고 나일강 쪽으로 더 내려오면 두개의 거대한 석상이 보인다. 아메노피스3세의 석상으로 그 유명한 멤논 거상이다. 처음엔 신전과 함께 세워졌겠지만 지금은 석상만 있고 주위는 허허로운 빈터뿐이었다. 의자에 앉은 좌상의 모습을 한 높이 20m에 달하는 석상들은 얼굴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의 무릎아래에는 왕비를 마치 소품처럼 조그맣게 만들어 세운 것이 재미있다. [18만평, 세계최대의 신전 카르낙] 카르낙신전은 아몬대신전을 중심으로 여러 작은 신전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신전공원이다. 기원전 2천년경, 고대이집트 중왕국시대부터 약 2천년간 여러 파라오들에 의해 많은 신전들이 증축되었으며 동서 600m, 남북 2km의 총 18만평에 이르는 세계최대의 신전이다. 람세스2세를 턱밑에 품은 스핑크스 40여기가 도열해 있는 참배의 길을 들어서면 폭 113m, 높이 43m, 두께 5m의 거대한 제1탑문의 위용에 입이 벌어진다. 탑문 안 오른쪽 벽에는 신전을 건립할 당시 돌을 쌓는데 보조제로 쓰였던 기원전의 흙벽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옆에는 기둥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보여주기 위해 그 공정별로 기둥들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완벽한 복원만이 능사가 아니라 미완성인 채 그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보는 사람을 배려한 신선한 사례였다. 세계최대의 카르낙신전을 좁은 지면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카르낙의 백미는 역시 134개의 거대한 돌기둥들이 늘어서있는 기둥실일 것이다. 람세스1세, 세티1세, 람세스2세 등 3대에 걸쳐서 지었다는 고대 이집트의 최대의 건축물이다. 기둥실은 제2탑문 안에 있다. 제2탑문에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정복의 왕, 수많은 여인과 자신의 딸까지도 취한 정력의 왕, 111명의 아들과 51명의 딸을 낳았으며 신이기를 자처했던 람세스2세의 석상이 마치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처럼 서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조각과 현란한 채색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돌기둥들의 숲이 나온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선 석주들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은 감히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너도나도 쳐다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내자는 모세가 공사감독을 하던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아가사크리스티의 ‘나일강 살인사건’의 촬영현장이고 세계적인 명품들의 광고촬영장소로 많이 활용되는 곳이라고도 한다. 크라낙의 또 하나의 명물은 파라오들이 태양신에게 바친 오벨리스크다. 투트모세1세와 핫셉슈트여왕의 오벨리스크가 남아있으며 핫셉슈트여왕의 오벨리스크는 높이30m, 무게가 무려 340톤에 이른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저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이곳에서 260km나 떨어진 아수원에서 완성해 옮겨 왔다고 한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두개를 나란히 세웠는데 현재 이집트의 대부분의 오벨리스크는 하나씩밖에 없다. 세계열강들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며 파리, 런던, 로마, 이스탄불, 뉴욕 등지에 흩어져 있다. 핫셉슈트여왕의 오벨리스크의 다른 하나도 로마에 가 있다. [안압지에 비견되는 룩소신전의 야간조명] 룩소신전은 끝없이 펼쳐진 리비아사막과 왕가의 계곡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나일강변에 있었다. 나일강 건너 사막으로 내달린 지평선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갈 즈음, 룩소신전은 야간조명으로 은은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몬대신전의 부속건물로 기원전 1천400년경 아멘호텝3세가 건설한 이 신전은 람세스2세가 증축했다. 제1탑문 좌우에는 람세스2세의 좌상과 하나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가 있다고 한다. 정면 벽면에는 람세스2세가 가디시(시리아) 전투에서 히타이트와 전쟁을 하던 모습을 아로새긴 벽화가 조각되었다. 이 전투에서 세계최초의 평화협정이 맺어졌다고 한다. 조명불빛에 은은하게 비치는 신전의 석상과 벽화, 기둥 등 석물들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마침 초승달이 신전위의 맑고 푸른 하늘에 밝게 걸려있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곳 신전에는 12세기경에 세운 회교사원도 있다. 모래언덕에 묻혀있던 신전위에 회교사원을 세웠고 그 후에 신전을 발굴하고 보니 이 사원은 신전위에 얌전하게 세워진 형국이었더란다. 지금도 이 회교사원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안쪽에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전의 벽화들을 회칠을 하여 덮고 그 위에 자신들의 성화를 그리고 조각해 예배를 보고 집회장소로 활용했던 흔적도 남아있다. 룩소신전은 3천5백년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고대이집트의 신전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교회로, 지금은 회교도들의 사원으로 이용되면서 변천해 오면서도 그들의 역사와 흔적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종교의 성지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순례자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룩소신전을 나오면 마차가 많이 대기하고 있다. 마차를 타고 나일강변을 달리는 기분도 색달랐다. 마차는 팁 포함 20불이면 한대를 빌릴 수 있다. 룩소신전의 야간조명시설은 안압지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어설펐지만 룩소가 이미 야경을 관광상품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던 점과 역사의 산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상품화한 부분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신라문화 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경주로서는 깊이 생각해야할 점이다. (gimhd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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