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1861년 통일 이탈리아왕국이 출범되었고, ‘비바, 베르디’의 주인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에 올랐다. 베르디는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오페라 중흥에 앞장섰다. 통일에 앞서 거의 20년을 동거한 주세피나와 결혼(1859)도 했다. 나이 50줄에 들어 설 무렵 거장의 삶은 누가 봐도 안정적이었다. 오페라도 만들만큼 만들었다. 베르디도 로시니와 같은 편안한 삶을 갈구하고 있었을까?
1869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뚫어 연결하는 대공사였다. 이집트로서는 엄청난 통행료 수입을 벌 수 있는 호재였다. 당연히 경축할 일었고, 이집트는 ‘오페라의 왕’에게 개통기념 오페라를 의뢰한다. 바로 ‘아이다(Aida/1871초연)’의 탄생이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라간 아이다는 전에 없는 대작이었다. 요즘에도 아이다하면 대작의 이미지가 강하다. ‘개선행진곡’으로 유명한 아이다는 성공적인 초연에 이어 밀라노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베르디의 나이가 58세였다.
아리고 보이토(A.Boito/1842-1918)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바그너의 음악을 숭배하던 바그네리언(Wagnerian)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음악이 늙은이들에 의해 사창가의 담벼락처럼 더러워졌다”라고 비판했다. 이는 베르디 오페라의 통속성을 지적한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 기반한 바그너의 묵직한 음악극에 비하면 베르디의 오페라는 천박한 것이란 뜻이리라. 아들뻘 되는 젊은이의 도발에 대해 오페라의 왕 베르디의 심정이 어땠을까? 훗날 보이토가 노선을 바꿨을 때 베르디는 관용을 베풀었다.
보이토가 베르디의 1857년 작품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를 24년 만에 개작(1881)하여 흥행시키자, 베르디는 보이토의 재능을 인정했다. 과거 베르디를 향한 보이토의 격정적인 반감이 이젠 연로한 작곡가의 창작욕을 지폈다. 바이로이트 극장을 세워 유럽에 독일 음악극의 위세를 떨친 바그너의 존재도 한몫 했을 것이다. 보이토는 베르디 나이 74세에 오텔로(1887)로 셰익스피어를 다시 만나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르디는 80세에 보이토의 대본으로 마지막 오페라인 부파 ‘팔스타프(Falstaff/1893)’를 만든다. 늘 비극을 선사하던 베르디가 마지막에는 관객들을 웃기고 싶었나보다.
훗날 베르디는 인생 최고의 작품을 고르라는 질문에 ‘카사 베르디’라고 답했다고 한다. 카사 베르디는 베르디가 사재를 털어 1896년 밀라노에 지은 은퇴 음악인들을 위한 집이다. 음악인이라고 해서 로시니나 베르디처럼 성공적이고 부유한 삶을 살지 못한다. 카사 베르디는 형편이 어려운 원로 음악가들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베르디의 유지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베르디는 1901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장례식은 성대했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00여명의 합창단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불렀다. 자신이 지은 집 ‘카사 베르디’에 4년 전 죽은 아내 주세피나와 함께 안장되었다. 12년 후인 1913년에는 베르디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베로나 오페라축제가 시작되었다. 고대 원형경기장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한 세기가 넘도록 유럽 최고의 관광상품 중 하나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