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기이」편 ‘만파식적’조에 감은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그리고, 주(註)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중기(寺中記)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처음으로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동해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삼한일통을 이룬 문무왕은 바다 건너 왜가 무거운 걱정거리였다. 왜의 잦은 침입은 신라를 초기부터 괴롭혔다. 그래서 문무왕은 왜를 진압한다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의미를 가진 진국사(鎭國寺)를 짓다가 죽는다. 처음 진국사라고 한 것은 남쪽 바다 건너 있는 왜를 진압한다는 진남루(鎭南樓), 진남관(鎭南館)과도 같은 맥락이다. 바로 이웃 기림사에 진남루가 있고 여수 전라좌수영에 진남관 등이 있다. 왕위를 이어받은 신문왕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는 부왕의 은혜에 감사해 진국사를 감은사로 사명을 고쳤다. 이곳은 동해로 나가고 들어오는 입구인 동해구(東海口)다. 또한 수도 신라에서 동해로 드나드는 최단 거리라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국찰의 격에 맞는 거대한 탑을 세우고 절을 지었다. 이후 경덕왕 때 감은사성전을 두었다. 성전(成典)은 사천왕사, 봉성사, 영묘사, 영흥사 등 주요 사찰을 관리하고 수리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월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감은사의 비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석축 위 목재 계단을 오르면 바로 중문지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단석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된다. 중문지에 올라서서 좌우를 살피면 웅장한 삼층석탑이 떡 버티고 있다. 중문지 앞 좌우에 석주가 누워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놀랍게도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금당의 기단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재의 면에는 톱니 같은 이등변삼각형 수십 개와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사찰에 유학의 원리를 뜻하는 태극이 새겨진 이유가 궁금하다. 감은사지는 남쪽에서부터 중문, 쌍탑, 금당, 강당 순으로 배열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이다. 중문 좌우에서부터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 위에 면석을 세우고 그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을 얹은 가구식이다.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가 있다.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그대로이다. 금당 북쪽의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발굴조사에 의하면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변경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회랑 중에서 남회랑은 중문 동 · 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7칸의 익랑(翼廊)이 금당 좌우로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졌다. 서회랑의 바깥쪽으로는 승방지가 있고 강당지 뒤쪽은 높게 축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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