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닳아진 도장에서 떠올려보는 쓸쓸한 왕국의 실존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가만히 있던 것들이 시인이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말을 걸 듯 반응하는 사물이 있다. 아니다 사물은 이미 말을 걸고 있었음에도, 시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사물은 자신의 의미를, 전 존재를 개진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거미줄과 함께 숨 쉬고 있는 목도장 속 아버지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 종이에 한번 찍어본다. 아버지의 성과 이름이 “문턱처럼 닳아”져 희미하다. 이것으로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닳았을까? 생각에 잠기는데 대답처럼 시인의 눈시울이 붉지며 눈물이 떨어진다(“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아마 식구들의 양식과 공부를 위해, 감당할 수 없이 기울어가는 가계 때문에, 혹은 딱한 지인들의 보증이라도 서 주시기 위해 우리 집이고 남의 집이고를 가리지 않고 문턱이 닳도록 다니셨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이 고개를 숙이기도 하셨으리라.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구나. 시인의 마음에 이제사 아버지의 고독한 실존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도장 속 아버지의 이름은 나라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아버지가 나라라니? 예부터 그 함의는 당연하다. 도장은 ‘옥쇄’ 이미지를 가진다. 옥쇄는 말하자면 왕국의 도장이다. 그러니 닳은 도장은 ‘흐린 나라’로 화한다. 우리 가문의 옥쇄를 분실하시지 않고 자식에게 침묵으로 물려주신 닳아진 이름, 닳아진 이름, 이름의 소멸은 왕국의 소멸과 같다. 시인은 그것을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로 상상력을 끌고 간다. 여기서 나라는, 권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마음속에 세워지는, 한없이 쓸쓸하고 어진, 무릎이 꿇어지는 나라다. 그 나라는 헐거워지는 국경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 어스름”으로 번진다.  문득 시인은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아 본다. 아, 이 어스름의 표구는 낙관만 있고, 그림이 비어 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유와 무, 있음과 없음을 초극한 공기(어스름)로 휘발되며 물질화되고 있다. 그것은 고독으로 귀결된 ‘아버지라는 나라’를 떠나보내는 의식이면서, 그것이 대기가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의식이리라. 어찌 이런 아버지가 한 사람뿐이었을까? 그 시절 대부분의 아버지들의 표상이고 실존이 아니었을까? 목도장 하나로 이 땅의 무수한 아버지들이 스쳐 지나가게 하고, 사라지지 않는 여백을 만드는 시인! 장석남을 한국적 서정의 적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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