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외동읍 신계리에 경주김씨 경암(敬庵) 김응춘(金應春,1547~1608)의 경암정이 있다. 예로부터 신계리는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1399~1453) 장군 그리고 경주성 탈환의 주역인 동엄(東广) 김득복(金得福,1561~1626) 장군과 동오(東塢) 김득상(金得祥,1565~1598) 형제 등 충신과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실제 이징옥은 양산(梁山) 출신이지만 양산과 경주는 지리적으로 외동 치술령을 사이에 둔 인접한 상황 덕분에 그의 후손들이 많이 우거해 살고 있으며, 김응춘 역시 신계리 출신이지만 양산의 대하(臺下)마을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김응춘의 증조부는 만호 김세적(金世績), 조부는 현감 김주(金柱) 그리고 부친은 참봉 김한(金漢)과 모친은 청주한씨 한인준(韓仁俊) 따님이다. 양산에 있을 때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신하가 입고 먹는 것이 임금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니, 어찌 자신이 위태로움을 가리겠는가?”라 말하며 마을 장정들을 모아 적과 싸웠고, 선조 임금이 의주 용만(龍灣)에 있을 때 순찰사가 임금께 알려 원종(原從) 3등 훈을 받았다. 1593년 2월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8년 무술 명나라 장수를 도와 기장(機張)에서 접전해 공을 세웠다. 동래정씨 정원적(元績)의 따님과 혼인해 양산군 대하리에서 아들 김대성(金大聲,1569~1659)을 낳았다.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김대성 역시 병자호란에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비분강개하였고, 삼전도(三田渡) 화친 소식을 듣고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온 강직한 성품이었다. 경주 출신의 김응춘은 양산에서 활동을 주로 하였지만, 말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과 수신을 하며 지냈다. 1604년 스스로 「경암기」를 지어 말하기를 “임인년(1602) 가을에 양산 대하리에서 선대가 살던 고향인 월성 동남쪽 장군바위 산 밑에 자리 잡았다. 3년이 지난 갑진년(1604) 봄에 사는 집 왼편에 두어 칸 초당을 세우니, 방과 마루가 갖추었으나 누추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산수의 경치는 장군바위가 우뚝 섰고, 효문동 들판이 그윽하였으며, 북쪽으로 대밭골 대나무가 푸르고, 남쪽으로 연지(蓮池)의 연꽃이 아름다웠다”라며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설명한다. 그리고 매사에 공경하고, 행실을 돈독히 공경하며,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 심신을 닦는 요결이라는 문구의 경(敬)자를 취해서 공손하고 공경하는 거처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 후손들이 집터 가까운 곳에 자연과 더불어 경암정을 건립하고 1946년 문중에서 현판을 걸었다. 1971년 9월에는 풍산 류석우가 「경암정상량문」을 지으며, “훈련원정 경암 김 공은 계림의 빛나는 가문으로 선조 때 창의하였다. … 모두가 살기를 도모해 자기만을 돌아보는데, 공은 홀로 강개해서 몸을 떨쳤다. … 나의 창과 너의 칼이 따르기를 원하는 무리를 보았고, 피를 마시고 상처를 만지며 힘을 다해 적군을 막았다. 낙동강에서 여러 번 도적을 잡아 큰 공을 알렸고, 기장바닷가에서 북쪽으로 쫓아 기이한 승리를 거두었다. … 아! 세월이 이미 멀어져서 아름다운 칭송이 점차 사라지건만, 오직 사모하는 아름다운 명성은 저절로 드러나 사람들이 애석함을 일으킨다”라며 경암정 건립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이 그의 「행장」을 지었다. 그리고 외동읍 죽동리에 있는 김응춘을 모신 추감재(追感齋)는 1921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5월에 공사를 마쳤고, 청 한 칸, 방 셋, 마루 네 칸의 여덟 칸 규모 집을 완공하였다. 1921년 6월에 월성 최현필(崔鉉弼)이 「추감재상량문」을, 1922년 9월에 8세손 김계환이 기문을 지었다. 후대에 와서 김응춘을 기리는 공간이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정작 경주지역에서는 의병 활동으로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옛 인물을 연구하는데 자료의 소략함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에 양산과 경주를 오간 부족한 그의 행적과 무신(武臣)이지만 학문적인 경암 김응춘에 대해 밝힐 자료가 발굴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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