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G.Verdi/1813-1901)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론콜레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에서 가까운 곳이다. 태어날 때는 프랑스 땅이었고, 곧 오스트리아가 이곳을 차지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는 듬성듬성 쪼개진 영토였다. 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사르디냐 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 베르디의 삶의 터전은 그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밀라노에서의 성공, 그리고 통일운동으로의 필연적인 참여가 뒤따랐다.
부친의 친구이자 부세토의 부유한 상인 바레치(A.Barezzi/1787-1867)는 베르디의 후견인 역할을 맡는다. 밀라노에서 유학을 한 것, 그리고 부세토의 음악감독이 된 것은 모두 바레치 덕분이었다. 바레치의 아름다운 딸 마르게리타(M.Barezzi/1814-1840)와의 결혼(1836)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비극의 전조였다. 슬하에 둔 1남 1녀가 모두 사망하고, 아름다운 아내마저 죽는다(1840). 불과 4년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불행들이다. 죽음에 대한 베르디의 두려움은 아마 말러에 견줄만한 것이리라.
죽고 싶을 정도로 크나큰 실의에 빠진 베르디를 건져 올린 것은 오페라 ‘나부코(Nabucco/1842초연)’의 성공이었다. 오페라 속에서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있는 이탈리아인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나부코는 당시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알려진 합창 아리아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sull`ali dorate)’는 국가(國歌)의 위상을 갖기도 했다. 나부코 한방으로 베르디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그는 평생을 함께 할 여인도 만나게 된다. 여주인공 아비가일 역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Strepponi/1815-1897)였다.
베르디는 1840년대에 애국적인 내용을 가진 오페라를 다수 작곡한다. 항간에 유행하던 ‘Viva Verdi(베르디 만세)’는 이런 베르디를 찬양하는 구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통일운동을 주도한 사르디냐 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향한 구호였다. Verdi는 Vittorio Emmanuele Re d’Italia의 두문자를 따서 만든 은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살벌했던 오스트리아의 압제 속에서 현란한 언어유희를 즐겼던 것이다.
1850년대 초반, 동갑내기 라이벌 바그너가 드레스덴 혁명에 실패하여 스위스 취리히에 피신해 있던 시기에, 베르디는 오늘날 ‘빅3’라 불리는 작품들을 초연한다. 1851년에 리골레토를, 1853년에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를 연이어 발표한다.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는 각각 프랑스의 유명 작가인 빅토르 위고와 알렉상드르 뒤마피스의 문학 작품에서 리브레토를 가져왔다. 베르디는 나이 마흔을 즈음하여 전성기를 달렸다.
이중에서 라 트라비아타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다. 라 트라비아타는 대한민국 최초의 오페라다. 1948년 시공관에서 김자경이 비올레타 역으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신데렐라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은 라 트라비아타의 패러디다. 거리의 여인 비비안(줄리아 로버츠 분)이 바로 당시 코르티잔(고급창녀)인 비올레타였던 것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비올레타에 공감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