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이름 ‘성찬’을 두고 오래전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께서는 걱정이 많으셨다. 고뿔이라도 들어 콧물을 흘리고 기침이라도 할 때면 이름을 잘못 지어 병 치레를 한다고 혼잣말을 하시곤 하셨다. ‘성찬’을 ‘성치 않은’이라는 의미인 ‘성찮’으로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외손자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단다. 감은사지의 소재지인 옛 양북면은 어느 외조모의 생각인지 21.4.1 문무대왕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우리 경북의 경우만 하더라도 면의 명칭을 바꾼 예로는 포항 대보면이 호미곶면으로, 울진군 서면을 금강송면, 원남면을 매화면으로 변경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지명 명칭을 바꾸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양북면 명칭을 이렇게 바꾸면 바로 남쪽에 위치한 양남면은 어떻게 하지? 양북이 없는 양남이라 아무래도 이상하다. 부질없는 생각을 접고 감은사지를 찾아 집을 나선다. 경주에서 문무대왕면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먼저 보문단지를 거쳐 추령터널을 지나는 길이 있다. 또 터널을 지나지 않고 추령재를 너머 꼬불꼬불한 옛길로 갈 수도 있고, 불국사로 해서 토함산 터널을 지나는 길, 석굴암을 비껴 토함산을 너머 장항리사지를 거치는 길이 있다. 최근에는 토함산 터널을 지나는 길로 주로 다니지만 추령재 꼬불꼬불한 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토함산 동쪽 골짜기를 흘러 내려온 개곡물과 함월산에서 기림사를 지나온 호암천이 만나고 이어 용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와읍이다. 와읍을 지나면서 경주 사람들이 널리 알려진 유머가 생각난다. 경주 동쪽 재 너머 읍이 셋이라는 것이다. 이곳 와읍을 비롯하여 석읍과 감포읍이다. 그런데 감포읍은 실제 행정구역으로 읍이지만 와읍과 석읍은 오지이다. 읍일 리가 없지만 지명이 그러하다. 고려 고종 25년 몽고군이 침략해 왔을 때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들이 불에 타고 말았다. 당시 황룡사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성덕대왕신종보다 네 배가 더 큰 종(49만 근)이 있었다.
그 종을 몽고군이 이곳 대종천으로 해서 가져가려다 폭풍우를 만나 그 종은 가라앉고 말았다. 이후 이 하천을 큰 종이 지나간 하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고 하고 그 뒤로 풍랑이 심하면 그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탐색에 나섰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는 황룡사의 종이 아니라 감은사의 종을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훔쳐가다가 대종천에 빠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하천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대동지지』,『동여도』,『대동여지도』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천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동해안에 면에 있는 내’라는 뜻인데, 일제강점기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라 대종천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대왕면 소재지에서 그 남쪽으로 대종천을 따라 뻗어있는 도로를 한참을 가면 바다가 보인다. 이 지점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멋진 3층석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감은사지가 있는 이 지역을 ‘용담(龍潭)’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이웃 마을인 원당리(院堂里)와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용당리가 되었다. 용담이라면 용이 깃든 소(沼)라는 의미이다. 감은사지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로 소(沼)가 있는데 지금은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 동해안 일대는 약 12만 5천 년 전 간빙기에 해수면이 현재보다 약 6m 정도 높았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또 다른 연구자에 의하면 매년 0.3mm씩 이 지역이 위로 솟아오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까지 바닷물이 차올랐으며, 감은사가 창건된 것이 1300여 년 전이니 그동안 대종천 토사가 퇴적되었을 것이므로 당시에는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