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천양희 헐벗은 산속 소나무만 푸르다 늘푸른 소나무! 그 사이로 까치가 날아다닌다 살아 있는 것들이 이렇게 좋다 이곳에서 내 하루가 다 끝날 것 같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 쌓인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누굴 위해 날 무릅쓴 적이! 하늘이 날 내려다본다 내가 날 내려다본다 내 몸 끝이 벼랑이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산길도 끝이 있어 주저앉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까치가 覺覺覺 깨우친다 언제나 나는 늦게 깨닫는다 늦은 겨울 한줄기 바람이 능선 따라 올라온다 조심할 건 저 늦바람! 지금은 꽃샘바람이 꽃을 시샘하고 있는 중 아마도 立春大吉할 -`覺覺覺`, 2월이 들려주는 음성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건, 자연, 사물, 새 등 비인간의 몸짓이나 표정에서 나의 깨달음과 고백을 이끌어내고, 인간 일반을 화들짝! 일깨우는 촌철살인의 일침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 그것은 특히 언어의 부림, 말놀이의 건너뜀에서 더 이상 초극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울림을 가진다. 그 어법과 말부림은 우리 시대 시인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시인이 아닌가 한다. 이 시도 그렇다. 헐벗은 산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늘푸른 소나무’는 메마르고 헐벗은 현실에서 변함없이 푸른 인간에 대한 상징이다. 소나무와 교융하는 것이 날아다니는 까치. 나무 새가 화답하며 서로 어울리는 그 모습을 보는 “살아 있는 것들이 이렇게 좋다” “내 하루가 다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감격적이다. 그런데 ‘끝날 것’이 ‘끝’을 부른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에서 시작도 그렇지만 끝이 좋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쌓인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누굴 위해 날 무릅쓴 적이!”로 이어진다. 이런 반성과 고백은 시인의 것이면서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내 몸 끝이 벼랑이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산길도 끝이 있어 주저앉는다”에서 나타나는 산길과 내 몸의 대비는 어떤가? 산길은 끝을 가지는데, 나는 내려갈 수 없다는 건, 가진 것이 몸밖에 없는 ‘불타는 홀몸’의 시인의 자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시에서 가장 돌올한 부분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까치가 覺覺覺 깨우친다”는 구절이다. ‘깍깍깍’과 ‘覺覺覺’의 물오른 언어를 보라! 까치가 갑자기 각자(覺者)가 되어 진리를 설파한다. 이는 자리에 따라 움직이고 권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대한 메시지이면서, 홀몸의 시인의 소외와, 그럼으로도 그것을 너끈히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은 그것을 “언제나 나는 늦게 깨닫는다”고 세상 잇속에 따라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깨달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늦은 겨울 한줄기 바람이” 자신이 몸을 감싼다. 시인은 다시 한번 자신을 다그친다. “조심할 건 저 늦바람!”이라고 하여 인간의 일로 건너뛴다. 지금은 꽃샘바람이 ‘입춘대길’할 꽃을 시샘하고 있는 계절이라는 거다. ‘꽃샘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은 “立春大吉할” 인생이라는 자존감이 드러난다. 그뿐일까? 그것은 나의 생이 꽃피는 걸 시샘했던 남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남의 생이 꽃피는 걸 시샘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들어 있다. 2월이 시작되었다. 날씨가 포근해졌다고 풀어져서는 안 된다. 2월은 찬물과 더운물처럼, 봄을 앞두면서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두 계절이 섞인, “꽃샘바람이 꽃을 시샘하고 있는” 욕망의 계절이다. 2월의 초입에서 이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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