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책이 인테리어처럼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그 버리지 못하는 책들은 내 인생의 추억이 닮긴 책들이다.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담긴 책은 ‘상실의 시대’와 ‘살아남의 자의 슬픔’이다. 오랜만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고 다시 한번 추억을 돌아보았으며 또 다른 감정을 가졌다. 역시 책이라는 것은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와 시점과 환경에 따라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
예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에 더 많이 공감했다면 이제의 나는 ‘살아남은’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기운다.
이 책의 주인공은 20대의 ‘나’다. 격동기의 20대였고 고민과 반항의 20대였던 주인공과 또 다른 두 명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대한 증오와 반항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했던 ‘라라’. 결국 그녀는 꿈꾸던 유토피아에 다가가지 못한 채 자살을 통해 자신과 타협한다. 이러한 ‘라라’와는 달리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디디’. 그녀 역시 세상과 타협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임으로써 세상과 대립한다. 라라와는 다르지만 디디 역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본인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척 증오하고 반항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청춘기를 겪는다. 나 역시 격동의 20대였고 학생운동을 하였으며 염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읽었던 이 책이 내게는 위로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었겠지만 라라처럼 열정적으로 살아가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20대는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며 기득권 세력에 대해 불만이었고 불안이었다. 그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나서야 나는 세상에 진입했다. 이 책에서 말하듯 나는 세상과 타협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배웠다.
브레히트는 본인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강한자가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슬퍼졌다” 물론 브레히트의 시대에는 이념을 지키느냐, 사회와 타협하느냐 라는 고민으로 삶과 죽음이 달라졌을 수 있다. 우리 시대에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것이다. 과도기 혹은 청년기의 나는 강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그냥 살아있으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더 애착을 갖는다. 슬픔보다는 행복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할 때다.
이제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래서 내가 갖는 스트레스와 불안한 조건들을 최대한 단순화시킨다. 이 세상은 웃고 즐기다가 혹은 행복하게 살다 가기에도 짧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슬픔에 집중하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즐겁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렇게 나를 바꾼 건 성철스님의 ‘산시산수시수’라는 짧은 6글자였다. 산을 산으로 보면 된다. 물은 물로 보면 된다. 40대의 나는 이제 이 책의 ‘살아남은’에 집중한다.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면서 살아남아서 행복함을 그려본다. 어쩌면 나의 40대는 나의 20대가 증오하고 혐오했던 그 기득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의 20대는 결국 40대가 되었고 치열했던 20대를 생각하며 남은 행복을 그려보게 된다.
“광대한 우주, 무한한 시간, 이 태양계에 내려와서 지구라는 행성도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 간다는 것을 억울한 일이잖아요”
디디의 말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앤드오브타임’에서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여자 주인공 디디의 말처럼 광활한 우주, 무한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무슨 큰 의미를 담을 것인가?
내일의 나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을 더욱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간다. 누구나 죽는다. 물론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체 중 죽음을 또는 죽는다는 것을 아는 존재는 인간 뿐이기도 하다. 이젠 살아남아서가 아니라 살아있어서, 슬픈 게 아니라 행복해야 한다. 이재훈 씨 : 경주고와 홍익대학교를 나와 서울에 살고 있다. 신세계센터럴시티에 근무하는 직장인.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는 따듯한 가슴을 가졌다. 경주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 간사로 오랜 기간 봉사하며 고향과 고향사람 사랑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