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일째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불’과 ‘물’, 혹은 비극에 대한 응시와 내면의 성찰
황정희 시인의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는다. 담담하게 전개되는 시의 이면에는 세상에 대한 아픔과 이를 내면화하여 성찰하는 장면을 중첩시키는 매력이 있다. 바로 작년에 온 나라를 긴장시키게 했던 울진 산불 이야기와 자신 가정의 부부싸움 이야기를 녹여낸다.
그 두 사건 사이에는 ‘불’이라는 공통 이미지가 있다. 그 불은 무엇보다 ‘몸의 느낌’으로 와닿는다. 이 시는 살갗에 와닿는 뜨거운 온열감각 이미지로 시를 끌어간다. 상징주의자들은 불의 두 가지 기능을 이야기한다. 바로 ‘사나운 불’과 ‘따뜻한 불’이다. 산불과 부부싸움은 둘 다 사나운 불이다. 누군가의 실수로 산불은 났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부부싸움을 했다. 그 불은 산과 가정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더욱 산천의 불(울진 산불)과 가정의 불(부부싸움)은 둘 다 최대치의 숫자인 ‘구 일째’까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화자는 체육관으로 피신하게 된 할머니가 소들을 풀어주는 일을 목격한다. 그 할머니처럼 화자 역시 ‘뜨거워지는 열’(따뜻한 불)로 구겨진 감정(슬픔)을 다린다.
그 정성을 하늘이 알아들었다는 말일까? “​똑 똑/똑똑 똑똑” 비극적인 삶을 노크하듯 ‘빗소리’가 들린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화자는 속죄와 반가움이 반쯤 버무린 채 맨발로 뛰어나간다. 마찬가지로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소들은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둘 다 빗소리가 불러온 기쁨이다. 우리는 온열감각 이미지인 ‘불’(사나운 불, 따뜻한 불)과 ‘물’(불을 꺼주는 비)’의 결합을 통해 우리 삶의 비극이 진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본 셈이다.
이 시는 구성에서도 1, 2연은 산불, 3, 4, 5연은 부부싸움으로 균등분배하고 그 중간에 비의 청각적인 이미지 두 연, 마지막 두 연은 ‘돌아온 남편’,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로 첫 시작과는 역으로 결구를 완성하는 묘미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