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새해를 맞이해 동해안 감포(甘浦) 주변에서 일출을 보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감포와 혼반(婚班)의 인연으로 자주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바닷길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특히 송대말에서 감상하는 새해 해돋이는 가족과 함께하는 필수코스로 빼먹을 수 없는 연례행사가 된 지가 오래다.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로 불린 감포는 1914년 행적구역 통폐합으로 현재 감포리·오류리·전동리·전촌리·호동리·노동리·팔조리·나정리·대본리 9개 법정리에 52개 자연부락이 존재한다. 남쪽으로 울산, 북쪽으로 포항, 서쪽으로 경주를 향하며 주변에 감은사지, 이견대, 문무왕, 공암(孔巖) 등 많은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守禦)하는 곳이 울산 염포·통양포 흥해·해운포 동래 등 11곳이며, 그 가운데 경주부 감포(甘浦)에는 병선 6척, 군사 387명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외침 방어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萬戶)는 지방 일선의 요충지에 배치되었고,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임기가 900일이었고, 무예를 통해 임명하였으나 무과 합격자나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는 시험과 관계없이 임명되었으며, 훗날 지방 군사통솔체제의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종년간(1413)에 3품은 만호, 4품은 부만호(副萬戶), 5품은 천호(千戶), 6품은 부천호(副千戶)라 칭호를 다시 정한 기록이 있으며, 회재 선생의 석씨부인이 감포만호 석귀동의 소생이기도 한 일은 감포를 알아가는 소소한 재미가 되기도 한다.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경주를 다녀갔으며, 그 가운데 경관이 수려한 감포를 찾아 망국의 신라와 문무왕의 흔적 그리고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떠올렸다. 꼭 새해 해돋이가 아니더라도 여행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여행객에 있어 다양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앞서 『경주의 조선스토리1』저서에서 언급한 유람기행문을 바탕으로 감포의 일출을 찾아보았다. 「남유일기(南遊日記)」의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는 1857년 4월 27일 강원도에서 경주를 유람하며 동해창(東海倉)에 도착해 3일 기다려 일출을 보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기상이 나빠 일출을 보지 못하였다. 당시 바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만파정(萬波亭) 앞은 끝없이 넓은 바다가 가까이 있고, 바닷물은 바람도 없이 스스로 물결쳤다. 파도는 그치지 않고, 잔잔한 바람이 겨우 스쳤다. 물이 솟구쳐 뒤집히고, 벼랑에 서로 세게 부딪혔으며, 서해와 비교해 갑절이나 위험하다고 느꼈다. 아침이 밝았다. 손님 자격으로 정자에서 3일을 묵었으나, 구름에 가리어 빛나는 해를 보지는 못하였다. 오늘 우리의 여정은 오로지 바다와 일출 이 두 가지가 큰 볼거리였다”
4월의 감포바다는 파도가 세차고 연신 격하게 움직였고, 구름이 가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일출을 보지 못한 마음은 여정의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었으니 여행객의 마음가짐이 대단하고 여겨진다.
「동경유록(東京遊錄)」의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1580년 4월 18일~19일 감포를 지나며 운이 좋게도 일출을 보았다. 당시 상황을 간략히 적어본다.
“아쉽게도 비가 내리려 해서 해변을 가더라도 일출을 볼 수 없고, 우선 뒷날을 기다렸다가 날이 개었을 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주변에서 만류하였다. 역시나 다음날 가랑비가 아직도 뿌리고 구름이 어제와 같이 어두웠다. 마침 소봉래로 가는 길이 막혀 일행들은 이부자리에서 급히 아침밥을 먹고 도롱이를 걸치고 감포로 향하였다. 길 왼쪽에 봉화대가 우뚝 솟아있고, 어떤 한 사람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봉화를 피울 조짐이 없으니, 태평시대의 기상을 볼 수 있었다. 말 위에서 동북쪽의 한 조각 푸른 하늘이 비로소 보였다. 잠시 뒤 구름이 다 흩어지고 햇빛이 새어 나오니, 해당화는 선명하고 큰 물결은 잠잠해졌으며, 흰 돌은 맑고 깨끗하며 푸른 소나무는 무성하였다. 비 갠 뒤의 천태만상은 이루 다 접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이덕홍 일행은 하늘의 도움으로 감포의 일출을 만끽하였으니,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유동도록(遊東都錄)」의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는 1767년 10월 19일 동쪽으로 꺾어 큰 고개를 넘어 30리를 가서 나아(羅兒) 직동리(直洞里)에서 묵었다. 다음날 20일. “새벽에 일어나 마을 뒤 작은 언덕에 올라 일출을 바라보았다. 옅은 구름이 해를 가리었는데 앞서 동축사(東竺寺)에서의 경관과 같았다” 일출의 장관을 소략히 기술하였다. 사실 임필대 일행은 불국사로 가는 길이었는데, 고개만 넘으면 동해바다가 나온다는 얘기에 주저없이 급히 걸음을 돌려 감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나아에서 해돋이를 감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