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舊臘) 12월 31일 아침, 카톡 수신음을 듣고 모처럼의 늦잠에서 깨어났다. 군의 선배이자 함장이었던 최모 선배로부터 온 생일축하 메시지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필자의 생일은 선배와 같은 날이다. 을사생인 필자의 1965년 생일이 양력으로 12월 31이었는데 만 57년 만에 12월 31일이 된 것이다. 아일랜드에 있는 페북 친구를 비롯해 국내의 지인들은 잊지 않고 양력 생일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고 필자도 카톡 선물함으로 커피나 선물을 주는 친구들이 있어 싫지만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력생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21년 전 이맘때 한국해군을 대표하여 대테러 전쟁(Operation Enduring Freedom) 지원차 국산 LST(향로봉함)에 승조하여 인도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향로봉함 사관실에서 생일자 파티가 조촐하게 열렸고 당시 중령으로 함장이던 그 최모선배와 파견 참모였던 필자는 함상에서 함께 생일 케잌을 자르는 영광을 누렸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음력생일도 그 선배가 보내주는 문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그 최 선배가 4년 후배인 필자의 생일을 챙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국해군은 미군의 항구적 평화작전으로 명명된 아프가니스탄 대테러 전쟁에 월남전 이후 최초로 해군 해성(海星) 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별을 보고 대양을 건너 세계평화에 기여하라’는 의미인 해성부대를 창설, 2001년 12월 1일 제 1진이 진해항을 출항했고 이후 2003년 6월 24일까지 6진에 걸쳐 고준봉급 상륙함과 연인원 800여명을 파병했었다. 당시 고준봉함과 천왕봉급 상륙함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 바다에서 국제적인 위협에 공동 대처하고 바다에서 재해나 재난이 발생하면 비군사적·인도적 작전으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였는데 그 효시가 해성부대라 할 수 있다. 출항 전 언론이 해성부대에 보여준 관심과 보도회수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임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출항 이후 태평양을 건너 인도양의 미군 전략기지인 디에고가르시아 섬에 도착해 50여일 간, 이륙 직후 추락한 B1 폭격기 잔해를 찾아 원인을 규명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함정을 갈아타면서 2진 임무를 수행하기까지 약 7개월 동안 진행된 이 임무에 대해 언론의 보도는 한두 건에 그쳤다. 7개월만에 진해항에 입항했을 때, 국방장관의 성대한 환영은커녕 조용히 입항하여 각자의 부대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항간(巷間)에 ‘정치인은 사망에 관한 한 어떤 내용으로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게 낫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싶다. 저명언론인이자 학자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은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책에서 모든 국민들의 정치적 신념이 과연 정치 현실 즉,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선별적으로 접하는 기성언론 및 각종 디지털미디어를 통해 인식한 머릿속의 상(像)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한 자아 성찰을 요구할 것이고, 이러한 이성적 자아 성찰을 바탕으로 감정에 휩싸인 이념적 양극화를 극복할 것을 제안하였다. 돌이켜보면, 연안 상륙작전을 위해 건조된 국산 LST(향로봉급, 4300톤)를 타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며 작전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무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우리의 임무가 잊혀진 것은 어쩌면 그때 감정에 휩싸인 정치인들의 머릿속에 피해야 할 선별적 상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심지어 해군 구성원으로부터도 잊혀진 해군 해성부대. 하지만 21년 전 옛 전우이자 함장이었던 군의 선배로부터의 생일축하 메시지는 전장에서 생일을 같이 맞이했다는 하나의 인연으로, 해외의 전장을 누비던 당당한 대한민국 해군에 대한 자부심으로 선배님과 나를 끈끈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이 내가 음력생일을 소중히 간직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