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응당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내라! 즉 어느 곳에도 마음을 멈추지 않게 하여 마음을 일으키라는 것이다. 6조 혜능선사가 나무꾼 시절 저잣거리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오다가 이 소리를 듣고 홀연히 귀가 틔었다고 한다. 젊어서 어쩌다가 짊어져 본 나뭇짐으로는 귀를 뚫을 수 없는 듯하다. 여러 차례 골굴사를 찾고 있는 필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문헌을 뒤지고 검색에 의지하여 원고를 쓸 수 밖에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이곳 석굴은 모두 12굴로 확인되고 있다. 대부분은 동쪽으로 향한 암벽에 있으나 몇몇 석굴은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뚫려 있다. 굴과 굴 사이 통로는 철주를 박고 철봉으로 가로대를 설치하여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일부 구간에는 급경사 등으로 오금이 저린다. 현재 사용 중인 석굴은 산중일기 나오는 ‘승방굴’로 짐작된다. 이외의 석굴은 많이 파괴되어 일종의 감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석굴의 전면에는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 위로는 빗물을 돌린 물끊기 홈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입구 쪽에는 양 벽에 목조 가구를 설치하였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굴과 굴을 연결하였던 작은 길에는 회랑을 설치한 흔적도 확인되고 있다. 이들 회랑은 때로는 S자 형태로 설치되기도 하고 또는 계단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주로 기둥을 박았던 자취로서 둥근 구멍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산중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무렵에도 이미 파괴된 석굴이 있었던 것 같고 5-6개소의 석굴만 사용하였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전실을 마련한 석굴은 목조기와집에 단청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일부 굴은 앞면에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곳도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석굴 벽에 작은 감실을 수없이 많이 파고 불상을 안치해 두었는데 모두 최근에 만들었다. 법당굴 외에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손질하여 불상을 안치하고 관음굴, 나한굴 등의 이름을 붙였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던 것을 최근에 골굴암 마애불 좌우로 오르내리는 길을 안전하게 단장하였다. 굴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 위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라갔다. 처음 이르는 곳이 금강약수이다. 겨울철인데다가 날씨가 가물어 물이 거의 말랐다. 주위 상태가 약수로 마시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어서 제법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조심해서 올라가면 나한굴에 이른다. 불기 2545년에 봉안 불사를 했다고 하니 2001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부처님 주위로 18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부처님과 나한을 각각 다른 석재로 조성했다. 다음에 만나게 되는 굴은 약합을 든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굴이다. 약사굴을 지나면 골굴암의 주인이신 마애여래좌상을 알현하게 된다. 마애여래좌상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마애여래좌상 왼쪽으로 내려오면 바로 법당굴이다. 이 굴은 다른 굴과는 달리 앞쪽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기와를 덮었다. 출입문을 내고 단층을 하여 이곳 굴 가운데는 가장 단장이 잘 되어 있다. 이 굴에서 원효가 열반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굴 안에는 불상과 원효대사 상을 봉안하고 있다. 그 아래 지장굴에는 중심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그 주위로 많은 불상을 배치하였다. 다음은 산신당이다. 이곳에서 눈을 들어 위쪽을 보면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있는데 남근석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산신당을 여궁으로 보고 있다. 지역에서는 이곳에서 밤새 치성을 드리면 아침에 여궁에 정수(精水)가 가득히 고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소원성취의 징표로 여긴다. 산신당을 내려서면 이 절의 본전인 대적광전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웅장한 건물로 전각 안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 등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삼존불의 좌측으로 원효대사의 영정이 있어 이 사찰이 원효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