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1월 1일은 어제와는 뭔가 달라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 같다. 겨울 아침 나의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뭉개며 밖으로 나갈지 더 이불 속에 머무를지 사투를 벌이는 짧은 시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오늘은 평상시와 달라야 했다. 1월 1일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집에서 허투루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지난해 지지부진 보냈던 날들을 반성하며 오늘은 산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보리라.  음력으로는 아직 호랑이해.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떠나가는 호랑이 꼬리 기운이라도 잡자는 다짐을 하며 경복궁역에서 내려 인왕산 방향으로 걸었다.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집터를 끼고 돌아 이상의 집, 친일반민족행위자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건물(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을 지나 수성계곡을 향해 올라갔다. 빽빽이 들어선 다세대주택 언덕길로 걸음을 재촉하던 중 왼쪽 담벼락에 붙은 태극기에 눈길이 갔다. 누상동 9번지. 이곳에 1941년 5월 연희전문을 다니던 학생이 찾아왔다. 그는 5개월 정도 이곳에서 하숙하는 동안 열 편의 시를 썼고 자신의 시를 묶은 원고 세 부를 필사했다.  시인은 북간도 한인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던 명동촌에서 1917년 태어났다. 1905년 러일전쟁을 치르며 일본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반도 지배를 인정받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한 우리 민족의 만주, 간도지역 망명이 폭증하게 되는데 그의 조부도 일가를 데리고 명동촌으로 이주하였다. 명동촌은 한반도(동쪽은 한반도 조선을 의미)를 밝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외사촌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를 다녔고, 고등교육 진학을 희망했기에 은진중학교를 거쳐 친구 문익환을 따라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다.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로 갈등을 겪다가 자진 폐교하면서 광명중학교로 다시 편입하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외솔 최현배에게 조선어를 배운 영향으로 순우리말로 된 시를 썼다. 이후 일본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앞두고 고뇌하며 ‘참회록’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조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시인은 망국의 욕된 자아를 거울을 통해 성찰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그 어느 즐거운 날’이 찾아왔지만 그날이 오면 또 써야 한다던 참회록을 시인은 남길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3년 송몽규가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된 사흘 뒤 그 자신도 체포되었다. 1945년 2월 26일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그의 죄목은 ‘조선 독립운동 선동죄’였다. 재판판결문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는 구체적인 방향성은 그가 저항시인을 넘어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시인의 이름은 윤동주다. 일본국적으로 태어나 살아가던 그 시기, 다수의 문인들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했고 이상도 그랬듯 일어로 글을 쓰는 게 당연한 시절에 윤동주는 오직 금지된 우리말로만 시를 썼다. 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창씨개명에 괴로워했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란 곱디고운 본성을 가진 시인 윤동주, 그리고 그가 남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불안했던 시절에 한 줄 한 줄 읽으며 공감하며 울었던 책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30년 전 그때 그랬듯이 지금의 내게도 윤동주 시는 따뜻한 용기와 울림으로 다가온다. 20대를 시작하며 고향을 떠나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던 나는 오늘도 별을 헤며 불러볼 것 같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내 고향 경주를. 최유선 씨 : 경주여고 출신의 서울 출향인, 대교 해외사업본부에서 오래 근무했고 지금은 숙명여대에서 문화예술경영 박사과정 만학도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경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경주발전포럼, 재경경주향우회 등에서 오래 봉사해 왔다. 사회적으로는 (사)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평화재단통일의병에서 봉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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