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수많은 효자 이야기가 전하지만, 세종년간 전라도의 석진(石珍), 서흥(瑞興)의 김효생(金孝生) 등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의 효행을 통해 부모의 병을 낫게한 효자효녀로 유명하다. 경주에도 손가락을 끊어 효도한 허조원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실록』을 보면, 임신년(1452) 윤9월 24일(계미)에 경상도 관찰사가 계문(啓聞)하기를, “경주사람 허조원(許調元)은 나이가 14살인데, 그 아비가 오랫동안 간질(癎疾)을 앓았다.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약에 타서 올리니 병이 곧 나았다(慶州人許調元 年十四 其父久患癎疾 截指和藥以進 其病卽愈)”라 기록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해동잡록』․『동경잡기』 등에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었는데, 나이가 13세 그리고 부친 허정문(許程文)의 표기와 정신 이상을 광질(狂疾) 등으로 표기하였다. 허조원에게는 부모의 정신이상과 간질증세가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큰 장애요소였을 것이고, 오죽하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으로 올려 병을 낫게하려는 미신적인 행동까지 하게되었을까?라는 궁금점이 든다. 게다가 지극한 효도로 미화할 수는 있겠지만 의학적으로는 옳지 못한 행동임은 분명하다. 단종년간(1452~1455)에 이숭지(李崇之), 김순(金淳), 황효신(黃孝身) 순으로 관찰사를 역임하였기에 시기상으로 아마도 이숭지가 당시 관찰사였을 가능성이 크고, 관찰사가 허조원의 훌륭한 효행을 조정에 보고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하지만 실록에도 보고된 허조원의 정려(旌閭)는 사실로 확인이 되지만, 정작 정려의 흔적은 현재 자료조사로는 찾을 길이 없고,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거나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정려는 신라 때부터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삼강오륜의 유교적 풍속을 바탕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고, 가문의 영광이자 요역(徭役) 및 신분면천과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으며, 종종 정표(旌表)자의 진위가 논란이 되기도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세종년간 1441년 10월 22일 의정부의 상소문에 “손가락을 끊는 일은 지나친 일이오니, 반드시 이렇게 한 뒤라야 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도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버이 뜻을 순종하여 즐겁게 해드리고, 남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어 사람됨이 특히 뛰어난 자에게는 더욱 포상함이 마땅하오니, 이제부터는 중외(中外)로 하여금 일체 모두 표창해 천거하여 풍속을 장려하게 하되, 혹시 실행(實行)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지 아니하거나, 혹 실적이 없는 자를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천거한 향리 사람이나 관리를 캐물어 죄를 주게 하소서”라며 지나친 효행의 표창을 우려하였다.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효자의 행적을 기리고 표창한 경우가 허다하였고, 현재까지도 잘 보존된 정려가 상당수 남아있지만, 허조원의 정려는 경주지역에서 확인되는 바가 없으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누군가는 효행의 사적에 대해 시대적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진 왜곡된 역사의 잔재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효행은 인간의 기본덕목이자 실천되어야 할 행동목적으로 이해한다면 지나쳐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현대사회에 지난 역사의 효열비와 정려비각 등이 개발로 헐리고, 후손들의 무관심 등으로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행하는 효도는 대대로 계승되고 실천되어야 할 미덕일 따름인데 말이다.『효경』에 이르기를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거처할 때면 그 공경스러움을 다하고, 봉양할 때면 그 즐거움을 다하고, 아플 때면 그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그 슬픔을 다하고, 제사 지낼 때면 그 엄숙함을 다하여야 하니, 이 다섯 가지가 갖춰진 후에야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다(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疾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五者備矣 然後能事親)”는 말씀이 있으니 즉 매사에 최선을 다해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나아가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병이 나거나 죽는 이효상효(以孝傷孝)의 효행 역시도 정표에 해당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어려운 것이 효도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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