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는 승승장구한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유럽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등극한 바로 그 해,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를 원작으로 한 ‘오텔로’(Otello/1816)를 발표했다. 왕성한 창작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듬해에는 ‘라 세네렌톨라’(La Cenerentola/1817)를 무대에 올린다. 세네렌톨라는 신데렐라의 이탈리아어다. 이 오페라 역시 대성공을 거둔다. 로시니의 이름은 온 유럽에 알려졌고,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불과 25살 때의 일이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이런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럭키 가이 로시니가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영국여왕 엘리사베타’에서 여왕 역을 맡아 처음 만난 이사벨라 콜브란(I.Colbran/1785-1845)이다. 7살 연상의 그녀는 로시니의 뮤즈였다. 로시니의 오페라는 그녀를 위해 만들어졌고, 그녀는 뛰어난 가창실력으로 로시니의 작품을 빛냈다. 콜브란은 소프라노에서 메조소프라노까지 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할 줄 아는 최정상급 가수였다. 19세기의 마리아 칼라스였던 것이다. 로시니와 콜브란은 1822년 결혼한다. 콜브란은 바르바이아 극장장의 애인이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폴리는 오페라부파가 유행하던 도시였다. 로시니의 작품도 부파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로시니가 오페라부파에 특화된 반쪽짜리 작곡가라는 오명도 있었다. 아마 부파만 쓰라고 충고한 베토벤의 말도 액면 그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로시니는 ‘세미라미데’(Semiramide/1823)라는 걸출한 비극 작품을 발표하여 세간의 우려를 보기 좋게 불식시켰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오텔로와 함께 이탈리아 오페라세리아의 효시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로시니는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제안을 수용하여 파리의 이탈리아 가극장(Comédie-Italienne)의 음악감독으로 취임(1824)한다. 여기서도 그는 여러 편의 프랑스 오페라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기욤 텔’(Guillaume Tell/1829)을 발표한다. 기욤 텔은 우리가 잘 아는 윌리엄 텔의 프랑스어이다. 독일 극작가 실러의 마지막 희곡을 원작으로 하여 13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대항하는 스위스 민중의 이야기를 다뤘다. 공연시간이 6시간에 이르는 낭만주의 대작이다. 서곡이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된다.
로시니는 기욤 텔을 끝으로 오페라계를 떠난다. 그의 나이 37세 때다. 은퇴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의 장기인 벨칸토 오페라가 내리막을 걷고 있었고,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이미 모았기 때문에 오페라 창작에 대한 동기부여가 어려웠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은퇴 후 로시니는 파리 사교계의 큰 손이 된다. 또한 요리에 관심이 많던 미식가 로시니는 그의 이름이 붙은 많은 음식들을 창조해 냈다. 이 중에서 트루네도 로시니 스테이크는 소고기 안심에 푸아그라(거위간)와 트러플(송로버섯)을 곁들인 요리로 오늘날에도 인기가 많다.
로시니는 1837년에 이혼한 콜브란이 죽자(1845) 유명 누드모델 올랭프 펠리시에(O.Pélissier/1799-1878)와 재혼한다.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은 없었다. 그는 1868년 76세를 일기로 폐렴으로 사망한다. 그의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은 고향 페사로에 기부된다. 페사로 시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로니시음악학교를 설립한다.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작곡가 마스카니가 2대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