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지이다. 골굴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동지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가 퍼뜩 머리에 떠오른다. 하지만 골굴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부산 연산동에 마하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 나한전에 신라 때 조성한 16나한이 안치되어 있다. 지금부터 500여년 전 어느 동짓날의 일이다. 공양주가 팥죽을 쑤려고 부엌에 나가 화로에 묻어둔 불덩이를 찾았으나 불이라곤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먼저 팥을 씻어 솥에다 안쳐 놓고 불씨를 얻으려고 아랫마을 산지기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조금 전 한 행자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팥죽을 주었더니 먹고 불씨까지 얻어 갔다고 했다. 절에는 행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불씨를 얻으러 누구를 보낸 일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절 부엌으로 돌아와 보니 화로에 불덩이가 벌겋게 들어 있었다. 이것을 본 공양주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그 불로 동지 팥죽을 쑤었다. 그리고는 그 죽을 퍼서 나한전에 올리려고 갔더니 오른쪽 셋째 나한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공양주는 자신의 게으름 탓에 불씨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나한님께 용서를 빌고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하여 성불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9년 동지 무렵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일행과 더불어 중국여행을 하면서 용문석굴, 2015년에는 돈황막고굴과 베제클리크의 천불동을 찾았다. 중국의 3대 석굴사원 중 두 군데를 둘러본 셈이다. 언젠가는 운강석굴도 찾을 것이다.
2016년에는 BBS 불교방송이 주관하는 부처님 8대 성지 순례에 참여하여 불교유적을 둘러보는 중 영축산을 오르면서 아난다와 사리불의 수행처인 석굴을 본 적이 있다. 이 석굴은 인위적으로 굴착한 것이 아닌 자연 동굴이었다. 또 2019년에는 역시 BBS 불교방송에서 주관하는 아잔타, 엘로라 석굴을 둘러보는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일부 석굴에서는 채색한 불보살상도 만날 수 있었다.
인도와 중국의 석굴사원을 둘러보면서 석굴 내부의 불상을 표현하는 다양한 기법보다는 먼저 그 규모에 압도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왜 이런 석굴사원이 없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석굴은 모두 석회암이나 사암 등 비교적 굴착이 쉬운 암석이었다. 우리 경주 지역에는 큰 규모의 자연 석굴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을 조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석굴암과 같은 인공 석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삼국유사』 「의해」편 ‘원효불기’조에 ‘曉嘗所居穴寺旁’ 즉 ‘원효가 일찍이 거처하던 혈사(穴寺)’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경주 동천동 분황사 북쪽 동천사지로 전칭되는 부근 농가에서 발견된 서당화상비에는 원효가 입적한 곳이 혈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혈사라고 지칭할만한 사찰은 이곳 골굴사 외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기림사를 원효가 중창하였다고 하니 이곳 골굴사에서 입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창건 당시 골굴사의 사찰 이름은 혈사였을 것이고, 사격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이 사찰과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1688년 정시한(丁時翰)이 「산중일기」에서 이곳 골굴암을 둘러보고는 “돌 봉우리는 기괴하고 층층으로 이뤄진 굴과 전각은 완연한 그림 같다”고 감탄하고 있다.
그리고 또 1733년 정선(鄭敾)이 영남 지방 34개 지역 58개소의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2권 가운데에 경주의 골굴과 석굴이 있다. 골굴사(骨窟寺)는 사찰 이름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골(骨)은 뼈를 의미한다. 왜 사찰명이 골굴(骨窟)인지는 사찰 안으로 들어가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된다. 암석의 색깔은 물론 그 형태가 흡사 살이 모두 빠져나가 뼈만 남은 것 같은 모습이다. 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에 있는 골굴사는 얼마 전까지는 골굴암으로 기림사의 사내 암자이었다가 현재는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경주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감포 방향으로 가다가 골굴사와 기림사의 진입로인 안동3거리에서 죄회전을 하여 약 1.1km를 가면 전방 좌측으로 골굴사 표시판과 그 안쪽으로 일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