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은 지난달 27일부터 열흘간 경주시 벤치마킹시찰단의 일원으로 고대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들을 정리해 게재함으로써 독자들의 고대유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경주의 문화유산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부터 터키, 그리스, 스위스까지의 일정동안에 느낀 단상들을 각 지역별로 묶어서 게재할 계획이다.
싣는 순서
1. 이집트 카이로
2. 이집트 룩소
3. 터키 이스탄불
4. 터키 카파도키아
5. 그리스
6. 스위스
-편집자주-
[더 이상 범람하지 않는 나일강]
소설 람세스로 우리에게 낮 설지만은 않은 이집트. 지중해와 홍해에 연해 있으며 아프리카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인구 7천만명의 92%가 이슬람교을 믿고, GNP 1천300달러의 빈부격차가 아주 심한 나라.
100만㎢의 땅은 한반도의 약 4.6배이지만 약 95%가 사막이다. 사막성기후로 연간 평균 강우량이 15~20㎜로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신경통과 무좀, 자동차 폐기연한이 없다는 안내자의 말이 그럴 법하다.
아프리카 최강으로 평가되는 60만 군대와 35만의 경찰, 종교 감시차원의 비밀경찰을 포함하면 3명중 1꼴로 경찰이란다. 우리나라와는 지난 95년에 대사관계, 북한과는 73년에 이미 국교를 텄다.
이집트에 있어 나일강은 유일한 수원이며 젖줄이자 생명선이다. 빅토리아호수에서 시작한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한 청나일이 수단에서 합류, 지중해까지 6천750㎞를 흐르는 세계 제2의 나일강. 아프리카 내륙지방의 부엽토와 물을 공급해주는 이 강의 범람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나일강의 범람은 없다. 1972년 아수원 하이댐이 만들어지고 수천년을 이어온 대자연의 축복은 끝이 났다.
소양강댐의 65배에 달하는 담수량을 자랑하는 이 댐은 그 주변은 물론 나일강 일대에 심각한 생태계 파괴와 토지의 피폐를 가져와 댐을 허물어야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사막에 세워진 도시 카이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인구 1천740만명의 사막위에 세운도시이다. 카이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통령 관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이 건립했다는 전쟁기념관은 북한, 이집트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공항과 대통령관저가 있는 일부도로를 제외하고는 도로의 차선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무시되고 신호등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도로는 차량과 마차, 자전거, 오토바이, 보행자들이 마구 뒤섞여 아주 혼잡하고 무질서했다. 현대, 대우 등 우리나라 차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형 포니가 아직도 택시로 이용되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먼지들이 달라붙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도 아주 낡아보였다. 완공 후 부과될 세금 때문에 철근들이 노출된 미완성인 채로 건물을 사용하는 탈법이 엄연하게 용인되고 있었다.
카이로 시내와 인접한 지역에 공동묘지인 무덤집(무덤들의 구조가 집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는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고 상점들도 들어서 있는 사실상의 마을이었다.
[이집트국립박물관]
카이로 중심에 있는 이집트박물관 입구는 관광객들로 무척 붐볐다. 라마단기간 동안 오후 2시45분까지만 개관한다는 안내판이 이채로웠다. 입구에 설치된 금속탐지기를 통과하니 정원의 작은 연못에는 상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심어져있다. 파피루스는 줄기의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두드려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연꽃은 일종의 수련이었다.
1, 2층 건물의 약 2천여평의 전시공간에 석상과 같은 규모가 크고 많은 유물들을 빼곡하게 진열하다보니 전시장이라기보다는 마치 창고 같은 느낌이 들었다.
1층은 주로 석조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었고 2층은 파라오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투탄카멘은 9살에서 왕위에 올라 18살까지 집권했던 파라오로 도굴되지 않고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된 유일한 파라오의 무덤이다. 람세스6세 무덤을 도굴하면서 파낸 모래더미가 공교롭게도 이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었고 또 어린왕이라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관계로 도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가장 초라한 파라오였을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로 박물관 2층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람세스2세와 같은 위대한 파라오들의 무덤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있었을까?
3천300년전 유물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색상과 문양이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었다. 130kg의 황금마스크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들과 옷들이 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석조유물이나 금속유물은 물론 종이나 옷이 모두 깨끗하게 수천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가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이란다.
석조유물들의 조각 솜씨도 대단했다. 마치 비누조각을 다듬은 듯이 정교하고 매끈하게 조각된 석조유물들에서 빼어난 솜씨는 뛰어난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석회암은 조각이 용이하겠지만 화강암의 경우도 조각솜씨가 빼어났다. 물론 재질은 우리의 화강암보다는 단단하고 입자가 조밀한 석질로 보였다.
세계최초의 종이인 파피루스가 찬란한 색상으로 아로새긴 상형문자들과 함께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목조유물은 물론 석굴암처럼 석조유물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갖은 어려움을 겪는 경주로써는 그러한 면은 참 부럽다.
[피라미드와 황룡사 9층탑]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기자지역은 카이로에서 자동차로 10분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피라미드의 입구는 세계적인 유적지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마치 무슨 토목공사 현장 입구처럼 어수선하고 매표소도 현장사무실처럼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그러나 언덕배기를 올라서자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과 지평선을 가로막고 서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는 보는 이를 압도해버렸다. 피라미드와 함께 모래바람을 등지고 낙타에 올라앉은 아랍인들의 모습에서 4천700년전 피라미드를 축조하던 사람들이 보였다. 아울러 햇빛에 조영되는 피라미드에서 1천500년전 신라의 황룡사 9층탑도 아련하게 떠올랐다. 높이 80여m 였다는 황룡사 9층탑은 어쩌면 저보다 더 신비롭고 아름다웠으리라.
기원전 2천7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이집트에서 총94개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높고 북쪽에 있는 것으로 높이137m, 가로, 세로 각230m이다. 무게가 2.5톤에서 10톤에 가까운 268만여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총 무게는 6백50만톤에 이른다.
다음이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로 높이 136m, 변의 길이가 214m로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다. 세 번째 멘카우레왕 피라미드는 높이 62m, 한변의 길이가 104m이다. 그 옆에 규모가 아주 작은 왕비들의 피라미드들도 있었다. 한눈에 피라미드들을 볼 수 있도록 약 1km 쯤 떨어진 모래언덕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야트막한 모래언덕인 전망대에는 갖가지 토산품들을 파는 상인들이 관광객들을 반긴다. 낙타는 잠깐 타는데 1달러였다. 마침 날씨가 아주 맑아 멀리 사막에 흩어져있는 피라미드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3개의 피라미드 중 가운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만이 꼭대기부분 일부에 마지막표면을 화장석으로 잘 치장해 놓은 아름다운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이 피라미드만 내부를 공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난 석굴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너비와 높이가 1.2m 정도로 허리를 잔뜩 굽히고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비켜 오갈 수 있는 정도의 통로가 30% 내리막 직선경사로 약 100m 가량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경사기 심한 통로로 조금 내려가면 파라오의 방과 왕비의 방으로 짐작되는 부속방이 있다. 조명등과 사람들의 열기로 안은 매우 덥고 땀 냄새 등 다소 역한 냄새가 났다.
이 사막에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으려면 돌은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을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석회암은 카이로 인근지역에서 구할 수 있지만 화강암은 960km 떨어진 아수원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스핑크스의 몸체는 사자가 아닌 황소?]
살아있는 형상, 교살자, 공포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 스핑크스. 쿠푸왕과 카프라왕의 피라미드 사이로 난 경사진 길을 따라 500m 정도 내려오면 3개의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동쪽으로 앉아있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보인다. 높이 약 20미터, 길이 73미터, 폭 4미터에 달하는 이집트에서 가장 큰 스핑크스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언덕을 깎아 만든 것으로 얼굴은 사람이고 몸체는 사자라고 한다.
수천년을 모래사막에 묻혀서 몸체를 감추고 있었던 이 스핑크스는 모래바람 때문에 목 부위가 특히 많이 손상되었다. 그리고 멋있게 붙어있던 수염을 영국인들이 가져가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드러나 있는 몸체와 꼬리를 보았을 때 사자보다는 황소에 더 가깝다는 안내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오이디푸스로 잘 알려진 그 흉악한 스핑크스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인자한 모습의 스핑크스, 그 뒤로 보이는 피라미드와 석양에 붉게 물들며 어우러지는 모양은 장관이었다.
스핑크스는 장제전을 거쳐서 올라가도록 되어있다. 장제전의 외벽은 석회암이고 내벽은 화강암이다. 돌을 어긋 만나게 쌓고 구석진 부분을 하나의 돌로 라운드처리해서 축조하는 방식은 보기에도 매우 단단해 보였다. 파라오가 죽으면 시신을 싣고 나일강을 건너 이곳에 와서 미이라 작업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피라미드에서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던 석재들을 이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강암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과 아수원에 있다. 시나이산은 약 430km 가깝지만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960km 떨어진 아수원에서 가져왔을 것이라고 한다.
나일강이 1년에 한번씩 범람하고 이때 물의 흐름이 빨라지고 수심은 깊어지고 강폭이 넓어진다. 이시기 아수원에서 뗏목을 이용해 운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1천 킬로미터를 운반한다는 게 간단하지 않다. 미리 건축물을 설계하고 아수원 채석장에서 돌을 캐내고 다듬어서 순서대로 운반하여 여기서는 축조만 하였다고 한다. 그 증거로 돌 하나하나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고 한다. 참으로 놀랍다. 4천500년전에 이미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토목기술과 돌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