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충효(忠孝)의 인물과 스토리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 세 효자 김응벽(金應璧)․김응규(金應奎)․김응정(金應井) 이야기 그리고 첨성대 부근의 문호사(汶湖社)와 정효각(旌孝閣)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1515~1599) 스토리는 우리의 일상과 가까우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적 가운데 하나다.
『동경잡기』를 보면, 김응벽 등 삼 형제는 모두 효성이 있고, 부친상을 당해서 삼 형제는 묘소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았다(金應璧與弟應奎應井 俱有孝誠 及遭親喪 三人廬于墓側). 이는 효행이 빼어나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려주고 귀감으로 삼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김응벽은 월암(月菴) 김호(金虎,1534~1592)와 더불어 창의하였고, 동생들 역시 벼슬에 나아가 본분을 다하였으며, 대대로 이들의 효행은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게다가 경주에는 삼 효자 외에도 3년 여묘살이를 한 효자가 많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신라의 손순(孫順)과 지은(知恩), 조선의 어린 효자 허조원(許調元), 남득온(南得溫), 박희남(朴希楠)․희장(希樟)․희정(希楨) 삼 형제, 최영린(崔永嶙) 등 그리고 특히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김윤손(金允孫)의 효행은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된다.
삼 효자의 부친은 김신종(金信宗), 모친은 언양김씨로, 삼 형제는 부친상을 당해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였다. 『명종실록』 1561년 윤 5월 21일의 기록을 보면, “유학 김응벽은 경주인이다. 성품이 본디 순수하고 독실하여 형제간에 우애가 극진하였으므로 서로 화락하게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일체 옛 제도를 따랐고, 자기가 몸소 흙과 돌을 져다가 장사지냈다. 여묘 살이 할 적에 10여 일간 장맛비가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버지의 무덤에서 김응벽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 김응벽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무덤 위로 올라가 방황하던 즈음에 북산(北山)이 무너져 여막을 쓸어 덮었다.”라며 정려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들이 밟은 계단은 움푹 파였고, 장맛비에 여막이 무너지기 전 부친의 음성이 들려 다행히도 신주(神主)를 온전히 보존하였으며, 영리한 신춘(神春)이라는 개가 각자의 집으로 편지를 통지한 사연 등은 오래도록 동도의 효자로 회자(膾炙)된다.
정려는 부의 남쪽 10리 금광제(金光堤) 위에 있었다고 전하며, 비석은 현재 탑동 오릉 숭덕전 동쪽 도로변에 이건되었다. 이후 1804년에 중건된 삼효각의 비문(碑銘)은 박종경(朴宗京), 축문은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 현판은 칠원현감 최심건(崔心健,1764~1808)이 썼고,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은 삼효자 정려각 중건기(重建記)를,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김씨삼효자 望阡碑銘(망천비명) 병서」 등을 지어 이들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이수인 선생은 안강의 인물로 가학을 계승하며 부귀공명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독서와 의리의 행실에 힘쓴 인물이다. 1796년 6월에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이수인ㆍ이정국(李楨國)ㆍ우재악(禹載岳)ㆍ정위(鄭煒)ㆍ김태익(金台翼) 등 영남의 5인에게 행실과 학식이 뛰어나기에 역마를 주어 보내라고 명한 일이 있었다.효자 월성김 공 형제 정려각 중건기-구암 이수인 우리 동경[경주]에는 예부터 효자가 많았는데, 신라 때 석종(石鐘)의 이야기부터 명성이 영원하고, 지금 『동경지』에 실린 아름다운 행실의 사적을 살펴보면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금옥 같은 형제이자 지기들은 그 덕이 외롭지 않고 후인이 사모함이 되었으니, 바로 경주부 효자 김 공 형제가 그러하다. 관란 이승증 공과 서로 나란히 이름을 이었으니 행실과 의로움이 어금버금하다고 칭송한다. … 공은 계림사람으로, 형제 세 사람은 김응벽․김응규․김응정이다. 세 사람은 나면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였고, 부친상을 당해 모두 여묘살이를 하였다. … 이는 진실로 동경의 믿을만한 기록의 역사이다. 아! 모든 행실의 근원이 세상을 통틀어 드물게 보이거늘 하물며 한 가문에서 세 사람이나 나왔다. 갑자기 돌아가신 부친의 부름과 집에서 기르든 가축의 순종함은 아마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같은 고을의 후학으로 매번 기상을 상상하고 흠모하였는데 나이가 이미 백발이 되었다. 하루는 김응규의 6대손 김명건(金鳴鍵)이 나를 찾아와 말하길 “우리 선조의 효행은 온 고을에서 전하고 암송되니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가첩을 상고해보니 조정의 정려가 만력 기사년 4월일에 있었으나, 신축년 사이에서 무너지고 없어져 지금 80여년에 이른지 오래입니다. … 선조께서 세상에 계실 때 늘 중건의 마음이 있었으나 결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 지금으로부터 8년 후에 재목을 모으고 지난 겨울에 공사를 시작해 금년 봄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옛 정려와 거리가 수백보 떨어졌으나, 금광 옛 둑은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 이에 한 말씀을 얻어 기록하고 싶습니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