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란에서 영화 ‘경주’를 다룬 1553호 기사 이후 몇몇 독자들로부터 도대체 왜 그 영화가 경주다운가에 대한 해석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영화가 난해하기만 했지 도무지 왜 그 영화가 경주다운 영화인지 모르겠다는 말씀들이었다. 영화나 소설, 특히 ‘경주’처럼 판타지적 성격이 느껴지는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이번 호에서는 순전히 기자의 입장에서 영화 경주가 경주다운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다.
우선 배경이다. 기본적으로 경주는 무덤의 도시다. 석조 유적을 제외한 대부분 건축은 조선시대 복원되었거나 재건되었고 더 많게는 1970년대 이후 경주개발계획으로 재건된 관광지들이다. 그에 비해 경주의 능들은 비록 일부씩 훼손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그대로 모습을 유지해 왔다. 신라 당시 경주는 황오동, 황남동 일대가 대부분 시가지이고 능들은 지금의 대릉원 일대, 노동동과 노서동 등 경주 시가지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삶과 죽음이 지척에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가 다른 유적은 다 그만두고 이 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경주다운 첫 번째 이유다.
다음으로 사람이다. 경주의 어느 대학교수가 연줄을 놓아 북경대에서 강의하도록 해달라고 조른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경주는 인연을 매우 중시하는 풍습이 있다. 오죽하면 경주에서 행세 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보통 계 모임을 열 개쯤 가지고 있고 사업이라도 할라치면 동창회나 체육회, 지역 모임 등에 가입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작은 인연을 놓치지 않고 북경대에서 강연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는 경주교수의 부탁은 이런 경주의 심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주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대놓고 드러내지 않지만 은근히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게 통하지 않으면 혼자 비방하고 화낸다. 그런 마당에 경주의 교수가 대놓고 부탁한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아닌게 그게 거절 당했으니 그 감정이 얼마나 거칠어지겠는가? 이런 심리는 극중 윤희(신민아 분)에 대한 영민의 마음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윤희를 짝사랑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엉뚱하게 윤희의 집에 들어가는 최현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며 압박하고 화내는 모습은 그런 경주사람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셋째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신비성이다. 이것은 대구와 보문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난 모녀와 그녀들의 죽음에서 먼저 확인된다. 최현이 다시 찾은 점집에서 어제까지 있었던 점치는 할아버지가 사실은 몇 해 전에 돌아가신 분으로 드러나면서 다시 삶과 죽음의 공존이 일어난다. 하이라이트는 최현이 국수집에서 나와 뜬금없이 도망치는 어느 길에서 오토바이 사고가 나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의 전개와 전혀 전혀 상관없는데 굳이 왜 이런 장면들이 들어갔을까? 경주의 능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물이듯 영화는 이 어처구니없는 장치들이야말로 경주라는 공간을 역설해 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북천의 어느 징검다리쯤으로 묘사되는 곳에서 최현이 오래 전 자신이 들었던 물소리를 듣는 것에서 다시 드러난다. 영화에서 그 하천은 바짝 말라 물이라고는 채 발바닥을 적시지도 못할 만큼 마른 하천이다. 경주를 묘사하는 많은 시와 소설, 만화들은 이 마른 하천 뿐 아니라 어느 지역 어떤 유적이건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물결 도도한 하천과 사사성장 탑탑안행의 경주로 변모시켜왔지 않은가? 영화 속 경주는 현실과 현장의 경계를 마구 허물고 있는 셈이다.
대미는 마지막 찻집 장면에서 마침내 문제의 춘화도가 나오는 것으로 장식된다. 여기에는 최현과 함께 이미 죽은 사람으로 묘사된 창희와 최현, 최현의 친구 춘원 그리고 윤희까지 함께 등장한다. 시간과 사람이 엉망진창 뒤섞인 느낌이다. 다행히 이미 영화는 이런 조합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진화한 뒤다. 이 장면에서 더욱 경주다운 것은 춘화도에 대한 해설이다. 창희는 춘화도의 여인을 최현으로 묘사하고 춘화도의 남자를 자신으로 표현한다.
즉 춘화도가 남녀의 교합이 아닌 남남, 남색의 현장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진위여부를 떠나 화랑세기에 나오는 숱한 남색(男色)의 기록은 영화의 단초를 제공하고도 남을 것이다. 거기서 오히려 윤희는 색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외자임이 드러난다. 마치 화랑세기에서 남색으로 인해 남편을 빼앗긴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전반부 창희의 아내가 최현에게 했던 말들, 최현이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 헤어질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나 깊은 밤 윤희의 집까지 따라가서 ‘별일’ 없이 떠나는 것이 동시에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는 춘화도 속 황새처럼 이 영화를 아리송하게 바라보고 있다.
물론 기자의 해석이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 경주를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독자들의 비판과 해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