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희망이 없는 것 같아” 갱도에 갇힌 지 열흘 째 되던 날, 작업 조장 박정하님이 보조 작업자에게 말했다. 지하 190m 깊이의 갱도 안에서 아연을 채굴하다가 900t급 규모의 토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고립된 상황이었다. 갱도에 갇힌 지 9일째가 되니 안전모에 달린 헤드램프마저 깜빡이기 시작했다. 램프 없이는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는 어둠은 이들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과연 이들은 살아나올 수 있을까?
어디선가 “발파!”하는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환청이었다. 사람 발자국 소리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들을 구조하려는 사람들 소리 아니냐고 동료에게 물어보지만 번번이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는 대답만 반복된다. 비닐 텐트를 치고 모닥불로 체온을 유지해가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를 받아마셨다고 한다. 그 유명한 커피믹스는 지옥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식량이었다.
“그러다 꽝! 하면서 불빛이 보였어요”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희열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 구조되었다. 마치 ‘잘 연출된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고립된 지 221시간 만에 찾아온 기적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사지(死地)에서 겨우 돌아온 그들 등에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지리한 싸움은 어쩌면 이제부터일지도 모른다. 보고에 따르면 베트남 참전 용사의 30%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했다고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면서 생긴 심리반응이다. 외상의 범위는 이처럼 갱도에 고립되는 사고부터 전쟁, 화재, 교통사고, 타인이나 자신을 향한 폭력과 범죄 등등 다양하다.
PTSD의 증상으로 침습적인 기억과 재경험이 대표적이다. 사건 당시의 힘든 경험이나 기억들이 잔인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이태원 참사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세포 안에 새겨져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식 시스템을 마구 할퀸다. 우연히 외상 사건과 유사한 상황이나 신호에 노출되면 마치 당시 상황이 재연되기라도 하듯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차라리 회피도 있다. 너무 힘든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가장 극심했던 상황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경험과 기억의 한 부분을 완전히 리셋(reset)해버리는 것이다.
한국 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KSTSS)는 이번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겪고 있을 마음의 고통과 트라우마 대응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사지에서 살아나온 생존자는 불안과 공포, 공황 등 트라우마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증상은 누구에게나 경험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며 또한 회복될 수 있다. 둘째, 유가족은 원망과 분노, 죄책감에 휩싸일 수 있지만, 그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이 고인의 잘못도, 살아남은 자들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셋째, 주위 사람들은 생존자와 유가족을 혐오와 비난으로부터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비판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도 효과적인 지지와 위로다. 넷째, 정부도 정신건강 전문가와 협력으로 생존자와 유가족의 정신건강 문제를 돌보아야 한다, 등이다.
끝으로 학회가 제안한, 재난을 겪은 후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심신 안정법을 소개한다. 먼저 심호흡.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후~’하고 소리를 내면서 내쉰다. 복식호흡. 숨을 들이쉴 때 아랫배가 풍선처럼 부풀고 내쉴 때 꺼지는 식이다. 다음은 착지법. 이제부터 흥미롭다.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쿵’하고 내려놓는다. 발뒤꿈치에 힘을 주면서 단단한 바닥을 느껴본다. 외상으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비 포옹법. 가슴이 두근대고, 괴로운 장면이 문득 떠오르면 ‘걱정 마’ 하고 두 팔을 가슴 위에 교차시킨 상태로 나비가 날갯짓하듯 두드린다. 스스로를 토닥이며 안심시키는 방식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