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밝히자면 말리는 죽었다. 의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소설의 첫 문장 치고는 이상한 말이다. 저자는 빨간 표지의 가죽 장정으로 된 멋진 책을 내면서, 게다가 이름을 ‘크리스마스 캐럴’이라고 지으면서, 왜 저런 문장으로 시작했을까? 아마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심각한 사회 현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요즘처럼 바보들만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면서, 즐거운 크리스마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크리스마스라고 해봐야 없는 살림에 나갈 돈만 많아지는 때 아니냐. 나이만 한 살 더 먹고, 그렇다고 한 시간 전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부정리를 해 보면 꼬박 열두 달 동안 적자만 나오는데...” 스크루지 영감이 즐겁게 인사하는 조카에게 대꾸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들 중에도 이런 심정인 분들이 많지 싶다.
180년 전 영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연말이면 다시 읽어보는 내 인생의 책이다. 어렸을 때는 스크루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유령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50대 후반이 된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 영국과 지금의 한국이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 나이가 스크루지와 비슷해진 탓도 있으리라.
사는 것이 힘든데 크리스마스라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냐? 나라가 좌우로 갈라져 주말마다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서 시위를 하는데 무슨 연말 타령이냐? 동창회, 향우회 모임에서도 발언 수위를 조심해야 하는 이 시절에, 까딱하면 정치 이야기로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는 살벌한, 날씨만큼 차가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너무 한가롭지 않은가? 그런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작가도 그런 비난을 우려했던 것 같다. 그래도 현실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작가정신으로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나라는 부유하고 기업도 형편이 괜찮지만, 개인들의 삶은 팍팍하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10년 전이나 5년 전 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 살림이 쪼그라들면서 마음도 움츠러들고 그러면서 스크루지처럼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다. 디킨스는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 건넨다. 크리스마스를 맞는 이 시절에는 그러지 말자,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자, 그 어렵던 시절에도 연하장을 보내고 이웃을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지 않았느냐, 구세군 모금함에 동전을 넣는 것이 미안해서 나중에는 지폐를 넣으리라 다짐하지 않았느냐, 그랬던 우리가 이제 지폐가 가득한 지갑을 가지게 되었는데 무엇을 망설이느냐, 완고한 스크루지처럼 살지 말자,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이웃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올 한해도 다사다난했다. 나라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연말을 맞으면서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워지고 싶다. 스크루지처럼. 소설 뒷부분, 잠에서 깬 스크루지는 외친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네. 유령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겠어. 마치 아기가 된 것 같아.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난 상관없으니까. 차라리 아기가 되겠어. 야호 신난다!” 나도 외친다. 메리 크리스마스!
*권은민 씨는 변호사 겸 수필가이며 북한학 박사다. 경주 출향인 모임인 경주고도보존회 상임이사로 오래 활동해오는 등 늘 고향에 대한 관심을 놓지않고 있다. 북한학 전문가로 남북 대치상황에서 보다 발전적이고 현실적인 남북한 교류의 탈출구를 제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