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은 경기 포천현 출신으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이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해 현감․직강․승정원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으며, 특히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등 시책을 비판하고, 민씨 일족을 비난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의병을 모집해 항일(抗日)운동을 하는 등 강직함을 종종 드러냈다. 게다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을 실천한 인물로 관직에 있을 때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물러나서는 노구(老軀)의 몸으로 의병활동을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진위대(鎭衛隊) 관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주로 재인․정읍․순창 등 호남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한 그는 68세 경자년(1900) 4월에 경기 포천에서 서호(西湖)의 정산(定山) 장구동(藏龜洞)으로 이사하였고, 5월에는 경주(慶州) 등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가족을 멀리 이사 보내고 고향에 혼자 남은 무료함을 달래고 겸사겸사 동쪽 지방의 벗을 만날 마음에 포천-가평-춘천[신재(信齋) 유중식(柳重植,1828~1905), 항와(恒窩) 유중악(柳重岳,1843~1909)]-홍천[이승조(李承祖)]-지평[양경환(梁景煥)]-거산[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1840~1918)]-원주[처가집]-제천-단계[인곡(寅谷) 강준회(姜晙會,1828~?)]-장담[유의석(柳毅錫)]-죽령-영주-안동[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1872~1951)]-영천-경주 먼 거리의 여정을 떠났다. 특히 유람에서 만난 인물들은 항일과 위정척사의 인물들로 춘천의 유중식은 명필로 이름났고, 종인들 가운데 의병장이 많았다.   항와 유중악 역시 위정척사를 실천한 인물이며, 홍천의 이승조는 이항로의 증손자, 지평의 양경환은 쇄국정책에 큰 공을 세운 양헌수(梁憲洙,1816~1888) 장군의 손자, 금계의 이근원은 이항복의 제자로 의병을 지지하였고, 강준회 역시 화서학파의 일원이고, 장담의 유의석은 삼종형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 가계를 잇고 의병과 항일에 가담하였으며, 안동의 이충호는 퇴계의 13대손이다. 아마도 최익현은 경유지에서 만난 인물과 유람의 목적 및 앞으로 의병과 구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면암집』의 연보(年譜)를 보면, “1900년 5월. 경주는 선생의 관향(貫鄕)으로, 항상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동도의 벗들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타향에 가족을 모두 보내고 더욱 다시 무료하여 마침내 포천에서 여정을 시작하였는데 문인 이장우(李章宇)가 따랐다.… 경주에 도착해 교촌의 종인(宗人) 둔차(鈍次) 최현식(崔鉉軾)을 방문하였다. 낭산서당(狼山書堂)에 올라 문창후 최치원 선생의 상서대(上書臺)를 살펴보고 여러 벗과 모여 강론하였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을 봉심(奉審)하고, 포회(浦會:갯모듬)에 가서 용산서원(龍山書院) 옛터를 찾았다. 문산서당(汶山書堂)에 가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양좌동(良佐洞)에 가서 침랑(寢郞) 이석희(李錫禧)를 방문하고,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또 옥산에 이르러 서원에 배알하고, 이병유(李秉裕)를 방문해 인종(仁宗)의 어필(御筆)을 봉심하고, 여러 현인의 옛 자취를 열람하였다. 한 달 남짓 고을 안 여러 명승을 유람하고 돌아오면서 대구를 경유해 종인 최정한(崔廷翰)을 방문하고, 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圭)을 방문해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8월에 충청도 정산(定山)의 집에 이르렀다” 최익현은 대구를 거쳐 안동 도산서원에 들러 퇴계의 후손을 만나고 영천 신녕(新寧)을 거쳐 경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먼저 교촌마을의 독립운동가 최준(崔浚,1884~1970)의 부친인 최현식을 만났다. 경주최씨족보와 대동보 서문 및 충의당 기문 등을 적은 그는 낭산에서 자신의 뿌리인 최치원 선조의 자취를 찾았다.   옥산과 양동을 찾아 회재 선생의 후손과 유물을 직접 보았고, 경주의 도학(道學)에 대해 살펴보았다. 게다가 1725년 계림사화에서 사라진 우암의 영정이 모셔진 문산서당에서 우암을 배알한 일은 옛적 인산서원의 존폐에 관한 중요한 기록자료가 된다. 또한 경주 등지의 여정 이후 구동정사(龜洞精舍)에서 항일의 다짐과 도학에 대해 깊이 논의하였고, 말년에도 항일과 무능한 정부를 향한 성토는 계속되었으니, 유람이 비단 승경지를 둘러보는 여행의 목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물의 깊은 연관성이 있는 매개체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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