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와 다구부인과의 관계는 리스토마니아가 절정을 이루던 1844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건 다구 부인이 리스트와의 일화를 소재로 쓴 소설 <넬리다>(1846)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귀족부인과 청년 화가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누가 봐도 다구와 리스트의 이야기인 줄 안다. 리스트는 1847년 러시아의 키예프에서 열린 자선공연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1819-1887) 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귀족 가문 출신인 비트겐슈타인은 자선공연에 거액의 기부를 했다. 다구 부인이 도도하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데 비해,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 리스트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스트는 순회공연을 중단하라는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조언을 수용하고 바이마르에 정착(1847)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듬해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취임(1848)한다. 바이마르 시절은 리스트에게는 황금기였다. 연주 말고 작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리스트는 피아노가 아닌 다른 장르의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만드는 걸 즐겨했다. 그가 무척이나 존경한 베토벤의 교향곡 9개를 모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절친형 베를리오즈의 걸작품 환상교향곡도 피아노곡으로 만들었다. 또한 동시대의 오페라(아리아)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이를 ‘패러프레이즈’라고 한다)하기도 했다. 당시엔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의 집에 피아노가 한창 보급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어야 하는 교향곡 또는 오페라 아리아를 피아노곡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탁월한 시도였다. 리스트가 단악장의 관현악곡인 교향시(symphonic poem)를 창시한 것도 이때다. 리스트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가톨릭이 이혼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남편과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청을 상대로 탄원도 하고, 로비도 했다. 결국 그녀는 1860년 혼인무효를 이끌어냈고, 이듬해 리스트의 50세 생일날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그러나 청천병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부인 남편의 역로비로 교황청이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리스트는 나이 50에 또 다시 크나큰 실연의 슬픔에 빠져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아들 다니엘(1859)과 장녀 블랑댕(1862)이 죽고, 차녀 코지마는 결혼 6년 만에 바그너와 불륜(1863)을 저지른다. 이때 리스트는 어릴 적부터 힘들 때마다 꿈꿔왔던 일을 드디어 실행한다. 수도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1863). 리스트는 동료에서 사위가 된 바그너와 결국 화해한다. 바그너 필생의 과업이었던 바이로이트 극장의 성공적인 건립(1876 개막공연)을 지켜보고, 그의 죽음(1883)도 목도한다. 3년 후 리스트는 유일한 혈육인 코지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다. 코지마는 아버지를 바이로이트 시립묘지에 모셨다.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그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8개월 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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