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고민했다. 나에게 큰 영향이나 감동을 준 책이나 영화? 처음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책과 영화 둘 다 매우 좋아해 바로 여러 가지 책과 영화들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고등학교 때 내 용돈을 모아서 산 ‘와처스’, 전쟁 영화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흘렀던 ‘흐르는 강물처럼’, 고등학교 때 처음 단체 관람을 통해 본 ‘정무문’, 대학 입학 후 하숙집 친구들과 함께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불초자 열혈남아’, 아내와 처음 함께 본 영화 ‘선생 김봉두’, 모두 감명 깊었고 의미 있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무엇을 골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한 며칠 작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문득 거실 책꽂이에 있는 책들이 보였다. 그때 생각난 책 이름 ‘데미안’. “아 그래 ‘데미안’이 있었구나!” 그리 많진 않지만 내가 지금껏 읽은 책 중에 ‘데미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데미안’이 우리 집 거실에 있었고, ‘데미안’을 산 이유도 분명 있었다. ‘아! 이거 분명히 고등학생 때 읽었었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성장소설이었는데...’ 우연히 책방에서 사서 읽고는 지금도 우리 집 거실 책꽂이에 있는 소설 ‘데미안’이다. 그럼 이 책이 다른 책이나 영화에 비해 나에게 무슨 큰 영향을 주었는가? 그건 아니다. 읽는 내내 오히려 지루하고 왜 이렇게 표현들이 진부하지?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데미안이라는 책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곤 ‘역시 고전은 따분해’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데미안’을 선택했는가? 이유는 바로 나의 큰아들 때문이다. 올해 고2로 내년이면 벌써 고3이다. 이젠 정말 성인이다. 하지만 그런 큰아들에게서 아직도 너무나 많은 허점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 부족함 중에는 큰아들이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읽고 싶은 책은 없느냐? 독서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독서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별 흥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큰아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이 바로 ‘데미안’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데미안’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책을 큰아들에게 권한 이유는 이 책이 성장기 소설이라는 것은 알기에 큰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이 책만큼은 큰아들이 꾸준히 잘 읽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말도 생각난다. 책의 내용 중에 무엇인가 자기와 비슷한 게 있다고, 그래서 무심결에 내가 한 말도 기억난다. “너도 데미안처럼 되면 된다” 지금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금 ‘데미안’이라는 책을 떠올려보니 내가 했던 이 말은 잘못된 것이었다. ‘데미안처럼 되면 된다’가 아니라 ‘너도 데미안이야’라고 했었어야 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동경했으나 결국엔 그 자신이 곧 데미안인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큰아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무슨 큰 변화나 깨달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로서 나는 기대해본다. 언젠가는 큰아들도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처럼 알을 깨고 나오리라고, 비록 알을 깨는 과정은 큰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아직도 여러모로 껍질을 못 깨고 있는 것 같다. 큰아들이 아니라 나부터 데미안을 정독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김수환 씨 : 경주가 고향으로 경남 양산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극본을 직접 쓰고 배우로 활약하기도 하는 열혈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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